갈등에서 나를 배우다
친구가 고민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직장에서 흔히들 겪는 상사와의 갈등이었다. 올해부터 우리는 함께 기도모임을 진행하는 중이라, 일반적으로 회사와 상사를 흉보는 식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갈등을 너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라고 그를 독려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아가는 동시에,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일상에까지 침투하여 우리와 우리 주변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도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과 바람에서 비롯된 응원이었다.
이런 경우가 많다.
불과 3-4년 전, 나도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속이 답답해서 사무실을 뛰쳐나와 엄마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일쑤였다. 한 손에 주먹을 꼭 쥔 채 눈물을 참아야 했던 날이 하루 이틀을 넘어서자, 멘탈이 서서히 붕괴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부서를 옮겼다. 인격적인 상사와 인격적인 관계. 새로운 팀은 전보다 평온했고 정상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상황은 나아졌지만 마음은 시원하지 않았다. 갈등의 원인제공자였던 옛 슈퍼바이저는 아무런 처분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자기 자리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대학원생의 신분으로 아예 다른 공부와 조금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서 내 과거의 모습을 많이 본다. 문득문득 그때의 감정과 그때의 내 얼굴이 떠오른다. 더 이상 답답하지 않지만, 내 지인들의 답답함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온다.
나는 친구에게 그 상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예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다른 임원들과 함께 하는 회의에서 자신이 가진 비전과 목표점을 잘 설명했단다. 모두들 조금은 놀란, 또 조금은 감동받은 눈치였단다. 친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한 스타일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속한 기관을 위한 깊은 마음으로 제시했을 프로젝트는 보나 마나 꽤 멋졌을 거다. 그러자 상사가 약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때 내가 네 옆에 서서 모든 영광을 너에게 돌려줄게!라고 했다는 거다. ㅎㅎㅎ
듣자마자 손발이 오그러 드는 동시에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사실 이 상사를 이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본 그의 모습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상대방 속에 선의가 가득한지, 악의가 더 가득한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신기’가 용한 사람은 아닌지라, 그저 내가 가진 정보에 근거하여 그가 독기를 품을 법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거다. 그러나, 그는 bright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랬더니, 친구가 내게 말한다.
"아냐, 그 사람 똑똑해(smart)."
나는 다시 답했다.
"아니, 똑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야. 똑똑하겠지. 내 말은 bright하지 않다고."
bright와 smart는 그냥 겉에서 보기엔 같은 단어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둘 다 사전적인 의미는 똑똑하다 혹은 영리하다, 이다. 그런데 두 단어가 가진 뉘앙스는 완전히 다르다.
친구에게 내 의미를 쉽게 전하기 위해서 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말하는 bright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야.
네 상사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거든."
자신에게 모든 명예를 돌려주지 않아도,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하다가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혹은 자신의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다. 그의 상사는 그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가 속으로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자신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더라도,
자신과 호불호의 취향이 정반대더라도,
자신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다르더라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그 사람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집중 혹은 눈치나 센스 같은 능력이 bright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로 눈에 담겨 있다. 사람의 bright(ness) 말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사람 눈 보는 걸 좋아한다. 때때로 나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한다.
절대로 bright가 모두에게 꼭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 가치관, 내 세계에서만큼은 그렇다는 거다. 난 이전부터 스마트한 사람보다 브라이트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대학시절 교수님이 한분 계신다. 심금을 울리는 뉴스 기사나 에세이를 보면 링크를 내게 보내주시는 분이다. 그분이 대학생이었던 과거의 나에게 말했다. 유나 너는 근면한hard-working 학생은 아닌데, bright한 학생이야, 라고.
난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어차피 내가 봐도 난 부지런함, 부단함, 노력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다.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할 만큼 좋아하는 것도 늘 내게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사람을 알아가는 것, 관계를 맺는 것, 각자의 속에 있는 어떠한 깊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내가 세상을 배워가고 세상 속에서 성장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 bright하다는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자 교수인 사람이 내 눈에서 그걸 봤다는 말 아니겠는가! 나의 bright를.
실수하지 않으려다가 되려 실수를 하기도 한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조심조심 유지해보려다가 필요 이상으로 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거나 나 자신의 안녕을 훼방하는 일. 조금은 풀이 죽어있는 친구에게 정말 괜찮다고 위로를 건넸다. 이런 갈등을 겪는 것도, 그래서 뭔가 기운이 빠지는 것도 모두 다 정상적인 일이고 반응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 저래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그에게 나는 나의 생각을 나누었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너 자신의 안정과 평안이 최우선 되어야 할 시기이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해결하려 하지 말아라,
잠시 모든 갈등을 옆에 그대로 두고 너는 너의 정체성과 너의 가치, 너의 도전과 발전에만 집중해라, 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bright를 읽고 만다.
거짓 웃음을 입고 다른 사람 챙기다가, 피나는 노력으로 갈등을 해결해 보려다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꿈꾸는 비전이 무엇인지를 놓쳐 버린다.
나의 정체성을 잃고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헛된 욕심일 뿐이다.
중요한 일을 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안 중요한 일들이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는 놓치기 쉽다. 나의 진짜 정체성을. 나의 진짜 마음을. 그리고 나의 bright를.
그래서 나는 나의 눈을 바라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체크한다. 또, 나의 주변에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의 눈을 바라본다. 그들 안에 반짝거리고 있는 영롱한 bright의 빛을 본다.
그때, 비로소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우리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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