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낄 것은 따로 있다
사랑도 받아본 놈이 줄줄 안다고, 센치해지는 밤이면 동생과 투덜댔던 아빠에 대한 불만 한 가지는, 칭찬에 해도 해도 너-무 인색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아이디어에서만 그쳐도 될 것들을 일로 벌리고, 그러다 감당치 못할 사이즈나 스케줄에 놀라 되레 뒷걸음질을 친다. 동생은 늘 칭찬에 고프지만 그 갈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가 되었고.
나름 전세대의 실수를 현세대에서 끊어보겠다는 듯 나는 칭찬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모르는 아가들은 사랑스러움과 또롱또롱한 두 눈동자를 칭찬하고, 지나가던 시크한 옷차림의 여성에게는 눈빛으로 존경심을 표한다.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칭찬을 하기가 좀 어렵다는 생각인데, 이 것도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고 있다. 요리를 잘하니까 식당 차려도 되겠는데? 죽인다, 다들 좋아할 멜로디야. 요즘 운동하나 봐? 어디서 샀어? 참 잘 어울린다. 칭찬은 두 팔 두 다리 사용할 필요 없이 입과 소리만 있으면 되니까 발버둥 중에서도 쉬운 편에 속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셀카에 어젯밤/새벽 사이로 아는 언니, 동생, 친구들의 댓글이 달렸다. 새롭게 자른 앞머리를 알아봐 준다거나 나보다 더 예쁘게 생긴 내 동생으로 착각했다는 '간접적 칭찬', 그냥 단순히 한 형용 사면 충분한, 예쁘다 라는 '직접적 칭찬.' 분에 넘치는 그들의 '라이크'와 '알아봐 줌'에 내 두 귀로 직접 그 칭찬들을 들은 듯 쑥스러워졌었다.
사실, 큰 의미는 없다. 그 순간에 예뻐 보이면 예쁜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별로다,라고 생각했는데 댓글로 남기기엔 너무 잔인한가 싶어 그냥 라이크만 누른 사람도 있을 거고, 얘 이렇게 생겼었나? 싶어 다시 한번 내 셀카를 봐준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직접적 칭찬도 간접적 칭찬도 아닌 애매모호한 댓글이다.
삶에 있어 어떤 것이든 아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행을 위해 돈을 모을 수도 있고, 너무 맛있어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인데 다이어트 중인지라 자제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우리 집 사정처럼, 칭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댓글을 모욕적으로, 인신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나는 아끼지 않기로 한다. 특히나 아끼다 보면 똥 될 이 네 가지는 더더욱.
원래도 옷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들을 다 집어다가 하나씩 입어보고 한 두 개만 골라서 구매하는 편인데, 요즘 들어서는 그 횟수도 줄고, 한 번에 집어 드는 옷의 개수도 줄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에 비해 자주 입고 싶은 옷, 소장하고 싶은 옷이 옷장에 더 많아졌다. 그렇다면 항상 어떤 옷을 골라 입어도 편안하고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않다. 어떤 옷이 너무 마음에 들면, 오히려 그 옷을 자주 입지 않기 때문이다.
아낄게 따로 있지, 내 돈 내고 내가 사 입는 옷이나 신발,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아낀다니. 이런 멍청이가 어디 있나!
마음에 쏙 든 색상 때문에 사놓고는 몇 번 신지도 못한 여름 운동화 한 켤레가 있다. 작년에 뉴욕에서 산 빈티지한 핏의 갈색 코트는 요맘때가 딱인데 올해 들어 처음, 오늘에서야 꺼내 입었다. 재작년에 선물로 받은 와인색 핸드백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발견했다. 옷, 신발, 가방들은 정말 아끼면 똥 된다. 유행은 남이 입는 것을 따라 입는 것만이 아니다. 최대한 유행 타지 않는 아이템들만 모았다고 해도 며칠 뒤에 또 맘에 드는 것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고,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 옷에서 저 옷으로 애정을 옮겨주는 것도 유행이다.
더 이상 나에게 꼭 맞는 옷, 똥으로 만들지 않도록 마음껏 입어주고, 또 나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새 시집보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어야겠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캡슐 옷장 Capsule Wardrobe 도 완성되는 것 아니겠나?
찻장에 가득 쌓여있는 차와 커피들이 있다. 이번 하와이 여행 때 사온 코나 커피나, 지난달에 밴쿠버 Moja Coffee에서 사서 갈아온 그들의 커피콩. 차도 많다. 옥수수차, 허브차, 레몬차 등등등. 장을 볼 대마다 새로운 커피와 차를 시도해보고 싶지만 있는 것 먼저 마셔 없애버리기 전에는 돈 낭비를 하고 싶지가 않아서 망설이게 된다. 밖에서 사 마시는 것도 물론 나름 로맨틱하고 좋지만, 우선 집에 있는 것들부터 좀 없애자. 안 마시면 유통기한 금세 찾아오고 쓰레기통으로 곧장 골인시켜야 하니까.
은퇴 후의 생활도 아예 준비 없이 될 대로 돼라 할 순 없고, 몇 달 뒤로 이야기 중인 두 번의 여행도, 내년으로 계획 중인 휴식도 다 구체화시키려면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월급에서 얼마는 생활비로 쓰고, 얼마는 따로 챙겨서 저금을 꼬박꼬박 해나가면 통장에 돈도 쌓이고, 쌓이는 돈만큼 마음도 두둑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돈은 써야 돈이고 돌아야 돈이다. 써야 할 때는 써야 사람처럼 살게 해주는 것. 바로 돈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 연봉이 (코딱지만큼) 더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그때보다 의미 있는 소비를 많이 하고 있지는 않다. 나에게 의미 있는 소비란 동생에게 밥을 사는 것,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것 정도인데 지난주에 한번 동생한테 (반강제로) 저녁밥을 얻어먹은 것이 지금까지도 좀 신경이 쓰인다. 버는 만큼 마음이 넓어져야 할 터인데 왜 더 좁아지는 것 같은 건지. 이런 식의 돈을 아꼈다가는 안 내려가는 똥처럼 마음의 짐만 된다. 써야 할 때는 쓰자.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자. (매일 하루씩 먹어가는) 나이만큼, (더 높아질 미래의) 연봉만큼.
대화를 이끌어내는 최고의 출발점이자 호감을 만들어내는 최상의 비등점, 칭찬. 듣고 자라지 못해서, 많이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나는 못해주겠다, 라는 심보와 지금이라도 많이 나눠주고 많이 베풀어서 내 삶에 가득하게 하여야겠다는 다짐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당연 후자를 선택하겠다. 왜 안 해도 되는걸 굳이 하겠다는 거냐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같은 이름의 책, Whale Done!: The Power of Positive Relationships을 쓴 저자 케네스 블랜차드 Kenneth H. Blanchard는 자신의 시간 중 사람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가장 가치 있다고 한 것처럼, 사람을 움직이는 칭찬의 힘을 홍보해온 사람이다. 나 또한 그의 생각과 같다. 칭찬은 사람을 움직이고, 관계를 튼튼히 하고, 결심에 불을 붙인다.
일본의 속담, 까닭 없이 칭찬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처럼 까닭 없이 칭찬을 남발하는 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짓이다. 그렇지만 칭찬의 상대를 잘 알고 이해한 칭찬, 특정 행동과 선택을 인정하는 칭찬이라면 독이 될리는 없으니 걱정 말아라.
소셜 미디어에 맞춤화된 소통방식과 문자와 짧은 전화통화로만 하는 연락에 만족하고 있는 요즘의 나를 보면서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자발적으로 나누던 편지들과 연말이나 연초에 주고받던 카드를 그리워한다. 나와 동생을 캐나다에 먼저 보내 놓고 한국 과자와 옷가지를 소포로 부쳐줄 때면 항상 박스 안에 함께 넣어 보낸 엄마의 쪽지. 시차가 달라서 전화가 힘들 때 나의 받은 편지함을 채웠던 아빠의 시. 누군가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밤을 새울 때까지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때 나 자신을 달래고자 책상에 앉아 노트에 끄적거렸던 글들.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이렇게 따끈하게 내게 남아있는데 현실은 아이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다. 이렇게나 다른 두 세상 사이에 껴서, 친구의 한마디 댓글에 글 하나를 쓰고 있다.
어쩌면 그 댓글이 나에게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한때는 다정하게 편지도, 카드도 주고받던 우리 사이. 언제부터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릴 만큼 'ㅋㅋ'를 남발하는 댓글과 채팅창의 메시지 속에 머물게 된 걸까.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나서부터? 내 인생을 멋있게 빚어보겠다고 반죽질을 하다가 과거의 관계들까지 힘차게 뭉개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간을 아끼겠다고 연락을 더디 하고, 방학 때 한두 번씩 보면서 친구라는 자리의 의무와 책임을 남몰래 요구할 때부터?
씁쓸한 마음, 댓글에 또 다른 댓글을 달지는 않기로 한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칭찬 듣고 들은 칭찬은 내가 이 친구에게 나누어주면 되지, 뭐. 가끔 만나 커피 마셔주고, 사는 이야기 들려주고, 연애에 대한 한 겹짜리 고민들을 나누어주는 걸로 되었다. 충분히 고맙고 고맙다.
아낄 것은 따로 있다. 입어야 할 옷은 입고, 마셔야 할 차는 마시고, 써야 할 돈은 쓰고, 해야 할 칭찬은 하되,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정말 따로 있다.
흙으로 돌아갈 한 번뿐인 나의 몸, 그리고 몸과 연결된 정신.
좋은 말과 좋은 소리만 담아야 할 나의 입술.
돈이라는 보상보다 그 돈을 벌게 해 줄 나의 열정과 꿈.
칭찬을 절대 공짜로 듣지 않고 칭찬만큼 더 열심히 사는, 따뜻한 마음은 꼭 나누고야 마는 나의 사람들,
진짜 아껴야 할 것을 아끼기 시작하면,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다 나누어주게 되어있다.
한해를 따뜻하게 마무리하게 해 줄 성탄기념/신년 카드. 그 안에 담길 감사함과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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