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여성의 미래를 위해 싸운 여성들
퇴근 후 저녁식사를 하고 동네 카페 중 유일하게 11시까지 영업을 하는 스타벅스로 향하는 길. 그 길목에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살고 있다. 건물 입구에 서서 젖은 머리칼을 털면서 건물에서 나오는 친구를 반겼다.
우리가 함께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의 아버지는 서점을 운영하셨다. 내가 그때 읽은 한국 책들의 대다수는 그녀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그녀와 릴레이 소설을 쓰기 위해 난생처음 새(벽) 탈(출)도 해봤다. Scout & Catalogue 라는 캐나다 밴쿠버 베이스의 브랜드를 즐겨찾기 하게 된 것도 그녀의 추천 덕분이었다.
어릴 적 우리의 활동 영역은 제한적이었으나, 제한적인 시공간 안에서도 꽤 많은 것을 공유하던 사이었다. 그런 우리가 이번 봄부터 한 동네에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 둘이 만난 것은 두 손안에 꼽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나와 그녀는 비슷한 시기에 (각자) 연애를 시작했고, 그녀는 직장에서 매니저가 되고부터 오전뿐만이 아닌 저녁시간에도 일을 하게 되어 꽤나 바빠졌다. 나는 여름 동안 한국을 방문 중이던 여동생이 돌아왔고 여름이 끝날 무렵엔 토론토에 있던 남자 친구가 돌아와 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당하고 있었다.
스타벅스에 도착해서 그녀는 콜드 브루 커피를, 나는 따뜻한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던 중 페미니즘, 이라는 단어를 먼저 꺼낸 건 나였다.
요즘 관심이 많아. 주로 미국 기자들이나 작가 들 글을 찾아보고 있어.
조심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는 말했다.
너무 빠지진 마.
그녀가 어떤 의도로 이 한마디의 말을 했는지 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분위기, 느낌, 감정, 아우라가 있다는 것도,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대강 어떤 모양, 온도, 색감일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과하거나, 욱하거나. 시끄럽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떼를 쓰거나 끝도 없이 원망만 하거나.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이 궁금해서 자료 조사를 시작하다가, 역사 속 여러 여성운동가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비친, 또 우리 주변에서 간혹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이성적이고 슬기로우며, 현시대의 우리에게까지도 모범이 되는 여성운동가들. 그들이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근래 몇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범죄, 특히나 여성을 타깃으로 한 사건을 다룬 기사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그에 반해 기억에 남는 페미니즘 관련 콘텐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영어권이 아닌 한국권의 콘텐츠는 더더욱 만나기가 힘들었다. 나의 네이버 검색 능력이 평균에 비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봐놓고도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오히려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해 궁금해하던 찰나 내가 발견한 문서들과 자료들은 1900년대 초,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던 나혜석, 김일엽, 박인덕, 허정숙과 같은 옛 여성들의 것이었다.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 이혼고백서, 1939년
나혜석은 참 많은 것에서 '최초'를 이룬 여성이었다. 그녀를 이야기할 때, '최초'라는 형용사가 빠질 수 없다.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한국 여성, 나혜석.
일본에서 미술 유학하던 시절, 유학생 모임에서 발간하는 학지광에 여성의 독립적 삶을 지지하는 글을 실었고,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첫사랑의 실패도 그녀의 자존적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후에는 3.1 독립운동에 가담해 감옥생활을 했고 여성을 위한 잡지 신여자를 창간했다. 일본 정부의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에게 포상으로 주어진 세계일주 여행을 함께 다니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법을 배우고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서 외교관 '최린'을 만나 연애를 하고 허락되지 않은 로맨스로 인해 1930년 이혼을 하게 되었다.
굴곡 많은 삶이었지만, 오랜 여행기간 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구미유기'라는 연재를 통해 조국의 여성들과 나누었다. 1930년 6월 당시, 지금으로 말하면 '동거'라고도 볼 수 있는 실험결혼론을 잡지 삼천리를 통해 홍보(!) 하기도 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모처럼 찾아볼 수 없는 여성의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인생 후기는 슬프고 외로웠고 빈곤했다. 그녀의 아들이 학교로 찾아온 자신의 엄마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여성운동가의 길이란, 세상과 가족마저 등지고 고독하게 걸어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삶의 모양을 위해 싸웠고, 남들은 입에 담지도 글로 쓸 수도 없었던 생각들을 기꺼이 외치고 기록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인형의 가, 1921년
나혜석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김일엽에게는 해방, 자유와 같은 단어가 참 어울린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재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김일엽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을 만큼 '열린' 여성이었다.
"...
엄마 아빠 울고 울면서
그만 땅 속에 영영 재웠소
땅 밑은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하지만
아아, 가여운 나의 나의 동생아!
엄마만 가는 제는 따라온다 울부짖던
그런 꿈 꾸면서 잠자고 있나?
새봄에 싹트는 움들과 함께
네 다시 깨어 만난다면이야
언제나 너를 업어
다시는 언니 혼자 가기를 아니하꼬마."
어린 나이에 더 어린 동생들과 사랑 가득한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아버지와도 이별해야 했던 김일엽의 어린 시절은 아픔이 가득했다. 다행히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있었던 학생 시절, 고등학교 때는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이화학당 대학 예과와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도쿄로 유학을 간 후에는 닉신여학교를 수료했다. 22세의 나이로 귀국한 김일엽은 당시 40세이던 이노익이란 남자와 결혼을 한다. 외할머니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가정을 일찍 꾸리고자 한 결정이었다.
남편의 후원으로 일본 영화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임장화라는 시인을 만나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된다.
3.1 운동 소식을 듣고 귀국해 여성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920년 3월, 신여자 <新女子>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된다. 일엽, 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 한국의 이치요(일본 작가)가 되라는 친구 이광수의 뜻이 담긴 선물이었다고.
“우리 신여자는 이러한 자각 밑에서 우리 여자 사회에 고래로 행하여 내려오던 모든 인습적 도덕을 타파하고 합리적 새 도덕으로 남녀의 성별에 제한되는 이링 없이 평등의 자유, 평등의 권리, 평등의 의무, 평등의 노작(勞作), 평등의 향락 중에서 자기발전을 수행하여 최선한 생활을 영위코자 한다.”
—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중에서
육체적인 정조보다 정신적인 정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정조론, 몸과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선택하는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운동, 가슴을 조여 매지 않는 서구적인 복식 개혁론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유교 성리학자들이 비난했던 과감한 단어의 사용 (여자의 가슴, 젖퉁이)도 서슴지 않았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 길일엽. 그녀는 속세를 향한 환멸로 입산, 몇 해 후 승려가 된다. 그녀의 출가는 그녀에게 절필이라는 또 다른 자유를 주게 된 것이었다.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자신의 출생 이후에도 계속해서 학업을 계속했던 아버지 때문에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를 보면서, 모든 꿈과 이유를 포기하고 가족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하던 여성의 삶에 대해 고뇌했던 허정숙. 배화학당 시절, 차마리아 선생님의 영향으로 자립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과 관심사를 눈치챈 아버지의 도움으로 간사이 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다시 유학을 떠난 상하이에서 첫 남편, 임원근을 만났다.
여성의 해방이란 사회의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이념, 이라고 믿었던 허정숙은 한국 사회에 꼭 맞는 여성운동을 위해 연구하였다. 그녀에게 있어 결혼은 온전히 자신이 내려야 하는 결정이었다. 또한, 남자와 가족으로부터 해방은 경제적 독립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남자처럼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람에게 의뢰하여 사는 기생충이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며 한 세상의 인간살이가 남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함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남과 같이 완전히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할 것이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이 선각자인 신여성들의 맹렬히 부르짖음이 있고 굳세게 싸움이 있다. ...(이하 중략)... ”
— 동아일보 1924년 11월 3일자 4면
결혼은 여자를 매는 옥쇄, 여자를 가사노동의 노예가 만드는 압제, 자식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원인이라고 외쳤다. 동시에, 인생의 주인공은 나,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라고 역설했다.
1921년 임원근과의 결혼 후, 1925년 그가 검거되었다. 그 후에는 1929년까지 송봉우와 동거를 했고, 송봉우와의 이별 후에는 최창익과 재혼을 했다. 첫 남편의 투옥 당시, 여러 남자들과의 자유로운 성관계가 스캔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그녀는, 사랑이 없이 성욕만으로도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했다.
허정숙의 자유연애론을 잘 나타내는 사건이 있었다. 1930년 11월 삼천리지에 실린 특집 기사, 남편의 재옥과 망명 중 처의 수절 문제, 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이 기사를 위한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이는 공개토론으로 진행되었는데,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과는 반대로, 허정숙은 경제적/성욕적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앞서 소개한 김일엽은 1년에서 3년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계급사회의 출처는 소수의 정보독점, 정보공유라고 믿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개혁되어져야 할 것은 지식교육과 정보전달이라고 외쳤다. 현사회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정보조작을, 허정숙은 이미 그 예전에 비판했었다. 그리고 여성의 정조, 결혼 전 성관계를 반대하는 세력은, 망상, 폭력, 독선이라고 지적했다. 하나의 틀에 인간을 가두는 것은 정신적 학대이자 폭력이기 때문에 사회 질서와 규범의 옳고 그름을 계속해서 되짚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자신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는 것이 큰 의미를 가졌다.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였던 그녀는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등 4개 국어에 능수능란했고, 수려한 말솜씨를 뽐냈던 달변가이자, 연극과 오페라, 드라이브를 즐기던 신여성이었다. 또한, 당시 성리학자들이 패륜아로 여길 만큼 혐오했던 단발을 즐겨하던 자유주의자였다.
1931년, 잡지 삼천리에서는 여성운동가들과 그들의 남자를 소개했었다. 허정숙 또한 그녀의 인생을 채운 7명의 남성과 함께 소개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기 뭐한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여성 계몽 운동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여성의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질문했던 훌륭한 운동가이자 작가였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박인덕은 조선의 노라로 불렸다. 또한 지금의 우리에게는 유관순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다. 박인덕은 어디를 가나 집중과 이목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었다. 당시 전원주택 한 채를 살 수 있었다던 만 원짜리 피아노가 딸린 집으로 시집을 갔음에도 절대 선생으로서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출산 후에도 학업의 열정을 가지고 6년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웨슬리언대학에서의 3년, 컬럼비아대학에서의 2년을 보내고, 32개국을 순회하며 조선의 독립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를 마치고 5개월에 걸친 세계일주를 끝으로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던 그녀. 그녀가 바쁜 일정으로 6년을 보내는 동안, 그녀의 남편, 한때는 만 원짜리 피아노를 사줄 만큼 부호였던, 김운호는 매달 그녀가 부쳐주는 20원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두 딸과,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이 있는 집이 있었건만, 박인덕은 귀국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돌아는 오고도 안 돌아오는 수수께끼'라는 기사를 실었다. 돌아왔지만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딸, 혜란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이었다. 유부남이었던 김운호는 박인덕과의 결혼을 위해 이혼했고,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로 사랑을 받던 박인덕은 그와의 결혼으로 신임을 잃었다. 게다가 결혼 후 한 달 만에 김운호의 사업이 줄줄이 망하면서 박인덕은 시댁 식구들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다시 교편을 잡았던 것이었다. 그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김운호는 옛 시절을 추억하며 낮잠을 잤다. 그들의 집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울음소리, 비명소리, 남자의 호령 소리와 매질 소리는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중 두 딸이 걱정되어 보냈던 20원의 생활비에 김운호는 이런 편지로 답했다.
“여자란 남편이나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 것이 본위니 속히 돌아오라.”
이혼 이야기가 오갈 때쯤에 김운호는 그녀의 변심을 이혼의 이유로 생각했다. 하지만 박인덕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편과 자식을 먹여 살려야만 합니까. 자식을 낳아주어야만 합니까. 그것도 아들만…. 그리고 옷 해 입히고, 밥 지어 먹여야만 합니까. 나는 여자이니 어디까지든지 남편의 종이 되라는 말입니까.
나는 결혼 이후 10년이 되는 오늘까지 그들을 부양해왔고, 그들의 어머니요 아내라기보다는 종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까지든지 그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달라는 것을 애원했습니다. 아내라는 사람은 뼈가 빠지도록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데 남편은 집에서 낮잠만 자야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인종할 수 없습니다. 신여성이요 선각자라는 내가 이에 굴종한다고 하면 이후 다른 여성들도 남편의 종이 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별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남편이 별거와 이혼이 무엇이 다르냐고 이혼해주마 한 것이지요. 또 시집갈 내가 아니요 남편이 탐나는 내가 아니니 이혼을 해주거나 별거를 하거나 문제가 아닙니다. 이혼을 해줄 터이니 돈을 내라니요. 모든 것이 나의 자유인 이상 내 자유를 돈을 내고 사겠습니까. 어린아이의 양육비로 달라고요. 자기의 자식을 자기가 기르지 아니하고 아내에게 양육비를 달라는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의 장래를 위해 호의로서 주고자 하는 뜻도 없지는 않으나 남편에게 돈을 준다 하면 이혼을 돈 주고 샀다는 오해를 받기 쉬운 고로 한푼도 낼 수 없습니다. 자식이 기르기 어려워 내게 맡긴다면 장성할 때까지 훌륭히 양육하지요. 그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어떠한 짓을 하든지, 나는 사회를 위하여 일하려는 사람입니다.”
여성 교육자이자 사상가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해야 했던 박인덕. 사람들은 처음부터 불결한 만남이었고, 결국 이혼이라는 파국을 맞이할만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그녀를 욕하기도 했지만, 유관순 역사 작업, 추모 활동 및 인덕 실업학교, 인덕 학원, 인덕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까지 힘을 다한 열정의 교육자였다.
며칠 전,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꿈이 꿈에서 멈추게 된 미국 대선이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캠페인 동안, 나는 지금 것 내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실감했다.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은 이미 어릴 적부터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할머니에게서 직/간접적으로 느껴왔지만, 실제로 지금의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남녀의 급여에서 우리가 직접 돈을 주고 사용하고 있는 남녀 생필품의 가격까지. 물론 대선의 결과가 힐러리 클린턴이 여자이고, 도널드 트럼프가 남자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단발을 한 여성은 패륜아, 여자의 일이란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돌보는 것, 이라는 역사적 잣대를 가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이 뽑힌 이유가 당최 설명되지 않을 테니까. 진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 오늘의 미디어는 미국 전체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 트럼프를 뽑은 유권자들은 현재의 미국 정부에 꽤 오랫동안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도 더 복잡하고 숱한 이유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떠나서 다양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여성이 대통령 후보에 오른 것 자체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같은 관점에서 보면,
헤어스타일도 마음대로 못 바꾸고,
몸과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연애할 수 없고,
현재 내가 입는 옷들은 감히 꿈도 못 꾸고,
가슴/젖이라는 단어는 사용해선 안되고,
유학은커녕 공부도 해야 할 것이 못되고,
결혼 전 성관계는 죽을 짓이었던 과거에서 참 많은 것들이 참 많이도 변했다.
우리는 아무 때나 아무 미용실에 가서 아무 머리스타일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연애도 한다.
나의 상황에 맞는 옷들도 원하는 대로 골라 입는다.
가슴/젖이라는 단어? 필요에 따라 말할 수도, 쓸 수도 있다.
경제능력만 받쳐준다면 유학도 떠나고, 빚을 내서라도 공부를 마친다.
결혼 전에 자고 안 자고는 내 맘대로 내가 결정한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 사소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분노해야 할 순간에는 당연, 분노해야만 한다. 평생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져버리고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거닐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음과 몸을 다 나누었다는 것은 분명 배신이 맞다. 그리고 여성운동가들의 변심은, 사회에 알려진 명성으로 인해, 더더욱 비난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자유가 없었기에 자유를 갈망했고, 그들의 갈증이 너무 다양한 모습들로 폭발해져 버린 거라고.
적어도 나는 이제와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밀며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내 기준에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닮지 않으면 된다.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여러 모양의 자유와 해방에 감사하는 것이다. 인간은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라서 무슨 풍파가 불어와도 견디며 살아가고, 어느새 그 바람의 세기에 익숙해져 더 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움찔하지 않던가. 여성의 독립적인 삶이 이미 오래전부터 주어져온 것처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당연함에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는다. 또, 세월이 지나감의 증거는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네 여성의 삶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난 감사했다. 작던 크던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참으로 감사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념도 많이 바뀌었다. 싸움이 필요하다면 싸우고, 울부짖음이 필요하다면 울부짖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우리의 옛 여인들이 했던 싸움은 단순히 과하거나, 욱하거나, 시끄럽거나, 감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떼를 쓰거나 원망만을 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의 여성 최초로 무언가를 해내게 한 용기.
자신이 배우고 본 것을 나누고자 했던 외침.
멈추지 않았던 기록.
가족을 위해 결심했던 결혼.
경제적 독립과 후대 양성을 위해 지켰던 학교.
이혼을 위해 건넨 위자료.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믿음대로, 자신의 능력대로 많은 것을 해낸 싸움이었다.
더 많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렸던 네 여성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Source:
Cover Image by Wikimedia Commons
Articles by Wikipedia, 나무위키, 김일엽(金一葉)의 여성성 고찰, 한겨례, 오마이뉴스, 여성동아, 한겨례21,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