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하면 안 되는 친구사이의 경고음
누구나 알게 되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두 친구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늘 그렇듯, 직장생활, 지금 만나는 사람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로 생긴 카페는 시큰한 맛의 커피와 치즈케이크의 어울림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말소리는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잔 너머로 흐르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나 자신과의 독대가 아닌 타인과의 시간이기 때문에 흐름이 중요하다.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하는 이유는, 서로에게 한마디를 주고 서로에게서 다른 한마디를 받는 것이기 때문인데, 우리의 입을 통해 건네지는 말들은 공기 중에 흩어지고 시간을 따라 흘러가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말. 말에는 온도와 모양과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 온도와 모양과 느낌이 자신의 것과 함께 어우러지는 타인과의 만남을 우리는 고대한다.
그런 만남이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통하는 만남일수록 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건넨 말을 점검하게 되고, 어떤 믿음 때문인지 나는 안도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우리에게 따라오는 가장 큰 수확은 평안일 것이다. 내가 그 순간을 감사했던 만큼 상대방도 좋은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평안.
어른이 되면 늘 이런 평안한 만남만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어른이기 이전에 나는 어린이였다. 바람에 나뭇잎 하나가 구르는 것만 봐도 크게 웃을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짧고 가장 맑았던 시기. 많은 이유가 없이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무언가 하나만 공감되어져도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가슴이 시원했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을 나의 ‘친구’라 이름 지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젊어지는 존재가 아닌 나이 들어가는 존재이므로, 어린 시절은 일생에서 가장 희미하고 가장 그리운 시절이 된다. 그때의 나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것은 오직 미래를 향해 전력 질주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어린이의 탈을 벗고 어른이 된다. 우리의 친구들도 삶의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어른이 된다. 우리는 이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나뭇잎 때문에 웃지 않는다. 많은 이유가 없이는 친구가 되지 못하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쉽게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아주 작은 무언가 하나만이 공감되면, 다른 모든 것들이 틀어진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진다. 나는 어릴 적을 또렷이 기억할 수 없는 어른이 된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가 제각각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시기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도 다 다르다. 같을 수 없음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면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친구니까 새콤달콤을 나누어 먹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꼭 맞잡고, 편지 끝마다 '사랑해 (하트)(하트)'를 남기던 과거가 지나고 나면, 우리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애정을 표현해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갖는다.
제한적인 소통만이 우리의 옵션이 된다. 문자/카톡, 전화통화, 만남, (간혹) 편지나 선물. 모든 친구사이의 소통은 이렇게 제한된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하루마저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문자 한 통이 충분한 대화가 되고, 통화 한 번이 아주 특별한 애정표현이 된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이라서, 문자 한 줄과 수신 전화 한 통에 부여하는 의미가 어마어마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반응, 즉 타인의 말투와 목소리 톤에서 우리는 애정을 기대한다. 원래 성격이 차갑고 쿨한 친구니까, 와 같은 이해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너를 소중히 생각한다’의 진짜 표현은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주는 것. 영원불변의 법칙 아닌가.
문자 하나를 보내면 답장 하나를 기대하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무척 행복한 것처럼, 크게 웃고 있는 것처럼 ㅋ과 ㅎ를 남발하는 단체톡에서도 내가 했던 질문을 기억하고 대답해주는 친구와 그냥 넘어가는 친구는 금방 구분할 수 있다. 숨넘어갈 만큼 직장생활이 바쁜 경우를 제외하고, 원래 매일 대화하는 사이니까 좀 편하게 쉽게 가자, 라며 ‘친구’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 애정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들은 사실 굉장히 평범하다. 늘 그래 왔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무감각. 혹은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공감의 부재. 재미있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애정의 불균형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정의 다른 의미들을 발견하게 한다.
어떤 관계에서 자꾸만 질문이 생기고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 연애, 친구사이 혹은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속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단순히 내가 그 사람을 대하는 모습과,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서 오는 애정의 불균형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그것으로 당신이 가진 질문이 대답되었는지 궁금하다.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애정의 불균형은 태도의 차이이고, 태도만으로는 차이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친구사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정리해야만 했다. 나 자신이 이상적인 친구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몇 관계들을 떠올리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려봤다. 어떤 때에 내가 친구들에게 가장 고마웠었는지, 그리고 그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기억해냈다.
내가 가진 친구의 가치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였다. 그리고 상대의 배려를 눈치채고, 묻지 않아도 먼저 나서는 ‘제안’이었다.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따뜻한 차를 권하고 그가 앉아 있는 소파에 찻잔을 가져다주는 것. 시내에서 만나기로 한 날, 조금이라도 차가 막히면 가는 길인데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알려주면서 미안해하는 것. 아주 짧은 한 마디의 말일지라도 상처가 될 말이라면 절대 아끼는 것.
친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줘야 하고, 친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건 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배려가 또 다른 배려를 만들어내고, 제안이 또 다른 추억을 낳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우정의 모습이다.
가치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늘과 땅 차이의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굳이 마음을 상해가면서까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해야만 할까? 마음이 맞고, 가치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정을 쌓아가도 모자란 것이 시간이지 않을까?
예전에는 친구가 많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원만하고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갖고 싶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덜 외롭고, 덜 심심하고, 덜 지루할 거라고 믿었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의 우선순위가 변했다. 일 년에 한 번을 만나도 의미 있는 만남이었으면 하고, 어쩌다 한 번 통화를 해도 줄 것이 있는 소통이었으면 한다. 우선순위가 바뀐 만큼 술자리는 줄었고, 술자리가 준만큼 친구(또는 지인)도 줄었다.
우선순위는 우리가 가진 가치가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우선순위에 달려있다. 내가 한 번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게 된 것도, 한 번의 소통에서 많은 깨달음들을 얻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의미 있는 사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오랫동안 지켜온 나의 꿈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되물을 수도 있다. 친구들과 이토록 텁텁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잘 풀리지도 않는, 시행착오가 많은 인생에 대해 굳이 대화를 나누어야 하나?라고. 나 또한 재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에서 본 말도 안 되게 웃긴 영상에 대한 수다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친구사이는 A에 치우치지 않은, B에 대한 얘기도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이든 간에 꺼낼 수 있는 사이이다.
.
나의 우선순위가 내가 현재 속한 지역과 사회에 따라, 내가 읽은 책과 만난 사람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우정도 그렇게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선순위가 통하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져가고 있다.
반대로, 우선순위가 통하지 않고 대화가 유동적이지 않은 관계들은 조금씩 속도가 늦어진다. 어느새 제자리에 멈추어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당연하게도 멈추어버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는 멀어지고 서로에게서 잊히게 될 것이다.
친구사이라는 게 시작과 끝이 만나는 큰 원과도 같다. 마음이 상하고 나서 내가 오히려 애정의 불균형을 만들고 있는 당사자가 될 때도 있었고,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일부러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을 때도 많았다. 모두가 피의자가 될 수 있고, 또한 피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애정의 불균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서로가 가진 가치와 우선순위가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되면 상대방 또한 이해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다름은 안다고 해서 절충되지 않는다. 쉽게 타협되어 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절교를 한다. 피의자, 피해자 딱지를 떼기 위해선, 상처를 그만 받기 위해선, 둘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큰 원을 끊어버려야 한다. 끊어버려야만 끝날 수 있다.
하나의 원이 된 관계에서, 두 사람의 문제를 절대 한 사람에게만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용기 있게 절교를 선언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주 고요하고 아주 천천히, 내 일상에 일부분이었던 사람들을, 내 일상 속에서 지워내는 나만의 절교를 한다. 동시에 그저 똑같은 하루를 살아간다. 그 안에 따르는 슬픔과 그리움은 온전한 나의 몫이 된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일. 나는 내 몫의 책임을 다 해야만 한다.
반갑습니다. 2월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주간 뉴스레터의 첫 발송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삶과 사랑, 일에 대한 좋은 글들을 모아 이메일로 보내드릴 예정이오니, 사소하지만 특별한 리딩 리스트를 원하시는 분들은 여기에서 이메일 주소로 구독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 좋은 밤, 좋은 하루 보내세요.
Source:
Cover Image by Greg Ra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