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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Feb 20. 2017

밴쿠버 헌책방 4곳엔 무엇이 있길래

그곳에서 받은 4가지 선물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밴쿠버는 캐나다 내에서도 따뜻한 편에 속하는데, 예상외의 강추위로 도시 전체가 꽁꽁 얼어붙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난을 떨었던 날들. 그래서인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외투를 단단히 여 매지 않으면 바깥 외출을 어렵게만 느껴졌다. 작년에 비싼 돈 주고 바꾼 타이어는 눈구멍에 빠져 헛발질을 해대고, 얼음이 돼버린 도로 위에서 원치 않은 몸개그를 선 보일 때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지난 주말, 해가 고개를 내밀었고 바람은 잔잔해졌으며 동그란 눈덩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주말다운 주말이었다. 그래서 오래 벼르고 있던 헌책방 투어를 강행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브런치 가게도, 입소문이 나서 줄을 서야 할 만큼 경쟁이 심한 새로운 식당도 좋지만, 오래된 문고리에 손의 안부분이 닿고, 들어서는 순간 특유의 냄새가 나는 책방이 그리웠다. 

그곳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많은 이들의 삶을 지나왔을 종이책의 감촉이, 

책을 읽느라 누가 오고 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옆모습이, 나는 너무나도 그리웠다.


인터넷을 통해서 중고 서점 13군데를 찾아두었다. 구글 맵을 활용 해서 각 서점의 이름과 주소를 저장했고, 하루 안에 둘러볼 수 있는 루트를 완성해 놓았다. 욕심 같아서는 13군데를 모두 다 들리고 싶었지만, 이동거리와 나의 집중력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한 것이 분명했기에 4군데로 시작하기로 하고, 먼저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1. 빛 Light


이스트 밴쿠버에서 다운타운으로 넘어오는 가장 빠른 길 중에 해이스팅 스트리트 Hastings Street가 있다. 이 거리를 타고 쭉 오다 보면 길 좌우로 집 없는 사람들, 집 대신 거리를 선택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존재로 인해서 개스타운/차이나타운에는 두 개의 얼굴이 생겼다.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힙한 카페와 음식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배제된 가여운 얼굴들이 있다.



한 블록 안에 등을 마주하고 붙어있는 거리일지라도 각자의 느낌과 모습이 다른 것은 이 동네의 이면성에서 비롯된 듯하다. 중고 서점 투어의 첫 도착지였던 The Paper Hound Bookshop은 한가하고 조용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헛헛한 웨스트 펜더 스트리트 West Pender Street에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온 것 같은 노란빛의 따뜻함. 오래된 이야기가 주는 신뢰감과 오랜 시선이 주는 안정감. 문을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무언의 환영에, 나는 이미 내가 이 서점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서점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빈티지 서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집트의 사랑 시집이라던가, 평온의 미학이라던가 하는 책들은 표지가 낡고 모든 페이지마다 모서리가 헐었지만, 자꾸만 손이 다가갔다.   



책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사진을 찍고 나오는 순간이 아쉬워 뒤를 쳐다보게 되는 서점 The Paper Hound Bookshop. 새로운 책과 오래된 책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꼭 이런 서점을 가지고 싶다는 거창한 욕심을 만들어주었다. 아무런 말소리가 오가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혼자서 책을 훑어보는 시간마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예상한 거보다 훨씬 긴 포옹과도 같은 곳이다.




2. 숨겨진 비밀공간 Secret


The Paper Hound Bookshop에서 한 블락을 더 걸어가면 McLeod’s Books라는 중고 서점이 보인다. 좁은 입구와는 다르게 꽤 큰 규모의 서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책장의 코너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복도, 책장 옆 할 것 없이 걸음마다 책에 발끝이 채일 정도. 



McLeod’s은 꽤 유명한 서점이었다. 어린 학생들부터 나이 든 노인까지 책을 구경하고 구매하는 사람들에는 어떠한 조건과 규칙도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시되어있는 책들도 큰 법칙이 없이 마구 꽂혀 있었는데, 아주 큰 카테고리만 책장 중앙에 적혀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들여야만 찾고자 하는 책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특별히 찾는 작가나 책의 제목이 없었던 나는 그저 편안한 바닥에 두 발을 올려두고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제목과 내용을 살피기로 했다.



지하 공간에는 함께 간 남자 친구가 찾는 역사책들이 가득했다. 주인에게 허락을 맡고, 직원들에게만 허용된다는 표식을 무시한 채 지하로 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또 엄청난 양의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엉덩이 크기만 한 바닥과 등을 기댈 벽만 있다면 누구든 자리를 잡고 앉아 손에 닿는 아무 책이나 펼쳐 비밀과도 같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난 이 서점이 참 좋았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인생이지만, 서점에서 만큼은 조금 다르다고 믿고 싶다. 내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고,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삶과는 조금 다르다. 서점에서는 내가 주인공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서점에는 내 과거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숨겨진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문 하나만 열면, 

아무도 걷지 않는 낡은 계단을 걸어가면,

책이 가득한 비밀공간이 나타나는 McLeod’s Books처럼, 중고 서점에는 나를 놀라게 하고 나를 감동하게 하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3. 이유 Why


메인 스트리트 Main Street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운타운에서 잠깐 달렸을 뿐인데 밴쿠버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동네 마운트 플리젠트 Mount Pleasant가 눈 앞에 나타났다. 이 동네를 다르게는 메인 스트리트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 도로의 양 옆으로 많은 식당, 바, 상점들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Y’s Books를 찾았다.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간판의 빨간색과 노란색의 조화가 어떤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어린아이부터 중년의 여성까지 여러 책을 읽고 있어서 작은 움직임에도 큰 신경을 쏟게 되는 조심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무신경하게 몸을 움직였다가는 소중한 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 것만 같았다.



추천받은 책을 골라서 계산대로 가기 전까지 가게 내에 은은하게 퍼지는 재즈의 선율을 들으며 깔끔하게 정돈된 책장들을 살폈다. 많은 양의 책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들만을 골라 내 눈앞에 선보여주는 것 같은, 누군가 나라는 사람만을 위해 준비한 책들이라고 속삭여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산대에서 마주한 직원도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계산대의 오른편에는 작은 그릇에 짧은 문장이 적인 종이 조각들이 있었는데, 누구나 원하는 문장을 골라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서점의 선물이었다. 이 서점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이 곳을 들러야만 하는 이유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었다.



서점의 이름의 뜻을 물으니 아무 이유 없이 그냥 Y’s Books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가 없는 것 마저도 이유가 되는 멋이 있는 서점이었다. 




4. 만족 Satisfaction


마지막으로 들른 Carson Books & Records Y’s Books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게도 서점 내부는 그리 잘 정돈되어 있지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사실이 불편하거나 거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헌책방의 모습은 대게 주인의 모습을 따라가게 되어있나 보다. 그래서 세계 수많은 도시에 생겨나는 작은 독립서점들도, 이름뿐만 아니라 공간의 온도와 색감마저 주인의 의도와 가치를 닮아가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는 동안 누군가가 서점으로 들어왔다. 집을 청소하면서 많은 빈티지 책들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책들을 이 서점에서 사줄 수 있겠냐는 문의를 하러 온 것이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지금은 책을 구매하고 있지 않다며 최대한 친절하게 거절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다른 서점들을 알아보라며 조언하고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서점 안에 있는 책들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의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나의 직장과, 나의 집과, 나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루하루의 삶 중에 만족하고 있는 순간들이 얼마나 되는지, 

나의 인생에는 내가 만족하는 물건들과 행동들과 결정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나는 정말 ‘나’인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조금은 까칠하고,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지저분하고, 조금은 인생의 때가 묻은 

서점 주인과 그를 닮은 그의 서점 Carson Books & Records


하지만 그의 고백에는 ‘만족’이 있었다. 

서점을 가득 채운 중고 서적들과 오래된 레코드들로 그는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이면 된다는, 순응하고 감사하는 겸손의 마음. 


중고 서점 4군데의 문을 열고 들어가, 누군가가 인생의 어떤 순간에 소중한 시간을 함께 했을 책들을 고르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이면 된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서점을 나섰다.






남는 시간이 많아서이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현실이 지겨워서든, 이민을 오면서 놓쳐버린 언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이었든,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을 만나는 중고 서점엘 간다. 


이번 기회에 다녀온 밴쿠버의 중고 서점 4곳에서 나는 선물을 받았다:


책의 표지를 관통할 만큼의 강력한 이 있었다. 

그 빛은 나의 마음을 밝히고, 나의 인생을 밝히고, 나의 꿈을 다시금 밝혀주었다.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같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를 거쳐온 책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더 담겨 있었고, 그곳을 방문한 사람만 아는 공간적 비밀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유가 없는 것마저 이유가 되어 주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들러도 환영받는 따뜻함이 있었고, 아무런 이유 없이 뽑아 들었던 책 하나와도 대단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만족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은 풍요로움을 배우고, 싫어하는 것에 마음 쓰지 않는 방법과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비법까지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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