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끝장 서울살이 생존일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장롱면허를 다시 꺼냈다. 이것이 세상 밖으로 나와도 되는 물건인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뚜벅이 인생의 고달픔이 최고조에 치닫았기에 예고된 수순이었다.
나의 운전면허증에는 '1종 대형'이라 적혀있었고 유효기간도 충분했다. (법적으로는) 당장 48인승 버스를 몰아도 아무 문제없는 자격을 갖췄지만, (실제로는) 쿵쾅되는 심장소리가 내 고막을 노크하며 옛 기억을 소환했다.
수능시험이 끝난 고3들의 하굣길 교문에는 가지각색의 봉고차가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파격적인 단체 할인가를 제시하던 운전학원 봉고차에 친구들과 탑승했다. 봉고차에서 한참을 자고 일어나야 운전학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저렴한 학원비를 생각하며 등록서류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첫 강습에서 과감한 질주를 시도했고 앞차를 들이받으며 모두를 당황시켰다.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을까 주저하던 내게 강사님은 말씀하셨다.
"저기 논두렁 보이죠?"
"네."
"논두렁을 달리신 분도 있어요. 괜찮아요."
운전학원은 논두렁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어떤 연습생은 2단에서 3단으로 기어를 교체하는 코스를 지나며 다시 2단으로 내려야 하는 걸 4단으로 올렸고 논두렁까지 냅다 달렸다고 했다. 나는 큰 위로를 받았고,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교통사고는 면허를 딴 직후였던 거 같다.
앞차와의 거리 간격은 여전히 가늠이 안되었고, 브레이크를 너무 천천히 밟아 신호에 대기하던 앞차를 박았다. 갓 20살의 세상 물정 모르던 소녀는 한순간 얼음이 되었고, 앞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지 않길래 가벼운 입맞춤 같은 접촉사고니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신호로 넘겨짚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알리 없었던 앞차 운전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당장 내리세요!"
"아, 내려야 되는구나.."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던 앞차 운전자는 나의 앳된 얼굴과 어리숙한 모습을 보고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혔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당부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뒤차에서 달려와서 사과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앞 좀 잘 보고, 정신 차리고 사세요."
마침 앞차는 정비소를 가는 길이었고,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테니 운 좋은 줄 알라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다. 책에 없는 운전 매너를 실전에서 호되게 배우는 것으로 접촉사고는 마무리되었다.
지난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복잡한 서울 도로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동안 운전을 해볼 일이 없어서 나아진 것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다시 운전면허증을 꺼낸 건 출장업무가 너무 많아서였다. 짐을 바리바리 싸매고 대중교통을 타거나, 관용차를 운전할 수 있는 동료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렇다고 택시 플렉스(flex)를 하기에는 월급이 너무 작고 깜찍했다.
아무래도 운전연수를 받으면 낫겠지 싶어 이리저리 인터넷을 검색했다. '6시간에 30만 원' 도로 진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장을 가려고 동료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혹시, 오늘 제가 운전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입을 떼기 전에 뭐라고 말할지 수차례 고민했던 것에 비해, 동료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키를 내게 건넸다. 운전을 허락한다는 건 자신의 안전을 나에게 맡길 수 있다는 의미인데... 막중한 책임감이 솟구쳐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운전연습은 회사차가 최고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관용차는 사고가 나도 보험 처리할 때 자부담이 없다는 걸 재차 상기했다. 나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데로 천천히 차를 이동시켰다.
로버트처럼 굳어버린 팔다리가 서서히 풀리고, 정면만 쳐다보는 시선의 각도도 점점 넓어졌다. 역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가로수길 풍경을 즐기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왜 진작 시도하지 않았나 후회가 들 정도였다.
한참을 달리니 저 멀리 톨게이트 진입 구간이 보였다. 간사한 내 심장은 다시 널뛰기 시작했다. 톨게이트 통로가 너무 좁아서 이 속도로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속도를 확 낮췄다. 통로 입구에 접근했을 때는 거의 멈추다시피 기어갔다. 뒤에서는 '빵빵빵빵' 요란한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좁아서 부딪힐 거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여기.. 버스도 지나가요."
동료는 옆을 보라고 했다. 정말로 똑같은 길을 트럭도, 버스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멈춰있는 동안 기다림에 지친 뒤차들은 옆 라인으로 알아서들 비켜갔다. 나는 그 순간 카레이서도 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다. '우와! 이 감정 무엇?'
그때 내가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아직도 운전연수 가격만 검색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동료의 한마디는 엄청난 응원이 되었고, 그녀가 결혼하던 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심성의껏 축의금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