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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Jul 07. 2024

11. 정의 카드: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뒤에 둘러쳐진 건 보라색 베일이어야 하는데, 카드가 잘못했네



회사생활, 동아리, 크고 작은 모임에서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의 바른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앞’에서 하느냐, ‘뒤’에서 하느냐의 차이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부동층 내지는 소극적인 사람들의 지지를 업고 제대로 관철시키기만 하면 조직 내에 유의미한 변화를 불러온다. 물론 혼자 유유히 떠나는 일이 더 많을 테지만 말이다. 반면 ‘뒤’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는 더 복합적이고 교묘하게 조직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한껏 조직 내 구성원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해놓고 혼자 휘파람을 부르며 떠난다든지,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 인식을 골고루 퍼뜨리고 살뜰히 나눠준 뒤 막상 경영진이나 권력층 앞에서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일도 있다. 자신의 스트레스야 풀리겠지만, 어설프게 버티고 있던 사람들은 잔류 의지를 상실하기 십상이다. 물론 이번에 다룰 정의 카드는 요란한 꼬리로 헤엄치며 온 강을 흙탕물로 만드는 상황 같은 경망스러움을 담고 있지는 않다. 충분히 ‘정리 해고’나 ‘권고사직’ 또는 ‘무기징역’을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카드다. 왕관을 쓴 데다가 초록 망토를 걸치고 있어 영향력 면에서나 존재감 측면에서 소시민 내지는 평민들에 비해 단차가 있는 높은 위치에 있다. 등 뒤에 둘러쳐진 보라색 베일을 보면 자신의 결정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논리까지 어느 정도 확보한 것 같다. 그런데 내 눈에는 자꾸 이 카드가 명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필기를 통과해 면접을 앞둔 다소 초조한 사람 같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정의는 과연 발견된 것일까, 인간이 발명한 것일까.            



저울 옆에 검이 없다면?

곤창을 매우 쳐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상도 그렇듯, 저울 옆에는 왜 항상 검이 있는 걸까. 검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왠지 컵 두 개를 든 천사가 등장하는 절제 카드와도 느낌이 비슷해진다. 검이 사라진 저울을 보고 사람들은 저울의 기울기가 드러내는 진실을 과연 순순히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잠깐, 여기서 오히려 나는 오히려 ‘검이 없는데’ 저울을 보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진정한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닐까 하고 생각의 회로를 돌려보게 된다. ‘너 10년은 감방에서 썩게 해줄게’라는 위협이 없다면 범죄는 역시 무한대로 증식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정의라는 것은 ‘권고’나 ‘자율’이라는 단어와 참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럼으로써 ‘공정’을 획득하게 되고 비로소 사회에 ‘구현’되는 것이 정의라면 정의겠지. 그런데 이 카드는 ‘살인을 금한다’ 같은 정의를 말한다기에는 어딘지 통치욕과 지배욕이라는 불순물이 조금 함유된 것 같다. 한마디로 머리에 쓴 왕관이 18k가 아니라 14k쯤 되어 보인다는 건데, ‘안 보이는 데서 내 욕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필히 신고하도록. 내가 이 칼로 단죄할 테니’ 같은 느낌을 받는 나는 어쩌면 이 카드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일까.          



여론과 주관에 휘둘리는 정의

자, 이제 눈을 감아요, 진짜 정의를 한 번만 보여주세요


 

법을 대표하는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반면 정의 카드는 두 눈 똑바로 뜬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뜬 눈으로 말하는 정의를 생각하자니 자연스럽게 대학 시절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고 레포트를 쓰던 때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지금은 ‘아닌 건 아닌 거야’라고 생각을 갈무리하는 법을 배웠지만, 세상이 온통 정리되지 않은 서랍 속 같았던 시기에 나는 얼마나 휘청거렸던가. 정의는 니체가 말하는 선과 악의 본질과도 같이 100퍼센트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다. 나에게는 적잖이 달콤한 예를 들어 보면 ‘동물 학대’에 민감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면 지금의 솜방망이 같은 처벌의 10배쯤으로 형량을 정하는 기준이 첨예하게 바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죄의 경중을 가리는 일에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 가치관’이 개입한 것이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고 초록은 동색이라, 혈연과 지연, 학연을 넘어서 정의에 도달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과연 뜬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치부를 샅샅히 밝힐 수 있을까. 저울의 도움이 있다지만 적당히 봐주거나 오히려 과잉 처벌을 야기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 살아오면서 ‘법대로 해!’ 하고 외쳐본 일이 없다. 주로 내쪽에서 손해를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배째라는 식으로 환불을 해주지 않았던 그 남자는 잘 살고 있을까? 만약 정의가 살아있다면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도 언젠가 칼 앞에 당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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