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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Jul 21. 2024

12. 매달린 남자 카드: 탈탈 털린 뒤에 찾은 것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이제야 비로소 세상이 보이네



카드가 뒤집어진 게 아니다. 남자가 뒤집어졌다. 더군다나 양쪽 다리가 아니라 한쪽 다리만 T자형 나무틀에 단단히 묶여 있다. 내 모든 무게를 다리 한쪽에 이어진 끈으로 지탱하고 있다. 온몸의 혈류가 아래로 아래로 모이고 중력에 길들여져 있던 장기도 거꾸로 매달린 남자의 몸 안에서 재배열되고 있을 것만 같다. 척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이 남자에게는 지금 땅이 하늘이고 하늘이 땅이다. 지상의 떠오른 모든 가치와 미덕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머리 가까이 있는 땅에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숨겨진 진리가 드러난다. 역전의 시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매달린 남자’의 시기가 찾아온다. 다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씩 들고 바쁘게 걸어다니고 있는데 나 홀로 묶여 있다. 서류 면접에서부터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취준생처럼, 일단은 정체되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머,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조롱이 섞인 웃음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 금발을 거꾸로 드리운 카드 속 남자는 어느덧 세상의 시선에 초연하다. 나만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또는 나만 겪는 고통이라 해도 괜찮아서.     



180도 달라진 세상에서 찾은 것     

그때도 나고 지금도 나다



이 카드는 흔히 ‘자발적 희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카드가 그려내고 있는 시점은 ‘자발적’일 수 있다. 매달린 남자치고는 한쪽 다리를 꼬고 두 손을 뒤로 뺀 모습이 퍽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과연 처음부터 이렇게 여유가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다리를 나무에 묶는 일은 어떤 도구의 힘을 빌리더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상황에 의해서 묶였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매달린 남자는 버둥거렸을 것이다. 풀어내려고 애써 상체를 접고 두 손을 한쪽 다리의 단단한 매듭으로 가져가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억울하고 비참한 자기연민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담담한 수용과 자포자기 속에서 이 잔인한 시간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한때 잘나갔던 나와 추락하고 망가진 나의 통합이다. 그때도 나였고, 지금의 몰골도 나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인생에서 한 번쯤 거꾸로 매달려보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는 지루하다. 이 남자의 삶은 매달리기 전과 매달린 이후로 나뉠 것이다. 지상에 단단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해지겠지. 걸을 때는 모른다. 매달려 봐야 내 자발적인 걸음걸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풀어준다고? 누가 누구에게 뭘 해주는데?

내가 나라서 다행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매달린다는 것은 철저한 버림이다. 일단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과 열쇠, 짤랑거리던 동전 등이 모두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 강렬한 감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세상에 막 태어난 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두 눈을 감지 않고 또렷하게 세상을 본다. 탈탈 털리고 난 뒤에 잃을 것 없는 이 남자의 머리에서는 어느덧 빛이 나기 시작한다. 후광이라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한 나름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한 겹 두 겹 돋아나기 시작하는 깨달음의 선물이다. 처음 묶인 시점에는 간절한 눈빛으로 ‘다리 좀 풀어주세요’ 하고 빌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쩌면 매듭 자체가 닳아서 스스로 풀려날 때까지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남자의 정신과 육체가 새로운 감각으로 채워지면서 원래는 죽은 나무였을 수 있는 나무틀에도 새싹이 돋아난다. 남자의 생명력이 새싹을 틔어올렸을지, 새싹이 돋아난 뒤에 비로소 남자가 생의 의미를 자각했을지 선후관계는 알 수 없다. 어느 나무에 열린 과실처럼, 남자는 이미 나무틀과 한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이 매달린 남자의 곁을 지나다가 기꺼이 다리에 묶인 매듭을 풀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런, 얼마나 힘드셨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남자는 아마도 ‘다행인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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