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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Jul 21. 2024

13. 죽음 카드: 인생월드 자유이용권 절찬리 판매 중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관계의 종말이든, 삶의 끝이든 공평한 죽음 앞에서는 그저 겸손하게



어떤 하루살이는 굳이 너른 시공간을 두고 얼굴 근처를 어른거리는 경우가 있다. 보통 집이 아닌 곳에서라면 그저 손으로 휘휘 내젓고 말지만, 이렇게 집요한 하루살이를 만나게 되면 나는 ‘혹시 얘가 죽고 싶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복잡한 움직임을 인간화해서 해석한다, 스스로 하루살이인 것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싶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손바닥을 마주쳐 이 작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무감마저 든다. 만약 이 하루살이를 앉혀 놓고 타로점을 본다면 ‘내가 원하는 것’의 자리에 필시 ‘죽음’ 카드가 등장하지 않을까. 작년 여름은 내가 자점을 통해 펼치는 카드마다 지겹도록 죽음 카드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어느 저녁을 끝으로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애정을 기반으로 웃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철석같이 안정적이라 믿었던 건물 하나가 지진이나 쓰나미의 기미도 없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죽음’ 카드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나에게는 사후세계와도 같은 후속 인생이 펼쳐졌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고 샤워를 하는 동안 차츰차츰 관계의 죽음을 인정하게 됐다. 애상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혼자라는 날것의 감각이 처음에는 너무도 생경해서 연애 기간 이전에도 나는 쭉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망각할 정도였다. 지금도 일종의 애도기간이 계속되고 있는 셈인데, 내 이별의 타격이 컸던 것은 한 번도 진지하게 ‘관계의 죽음’을 상정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만했고 순진했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그대로 밟아서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한 날 한 시에 죽는다 해서 같은 길을 계속해서 함께한다는 보장도 없다. 많은 이들이 ‘재회운’으로 타로점을 본다. 나 역시 이 모든 게 장마처럼 지나가는 시련이나 위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이다. 적어도 그 시절 함께 웃고 장난을 치던 시간은 다시는 그때의 형식으로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죽음 카드를 두고 아무리 발상의 전환을 하더라도 일단 무언가의 죽음 자체는 쓰다.      



호상이 될 만한 죽음도 있다

길흉화복은 죽음의 주체에 달린 일



뜬금없이 ‘적의 적은 아군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앓던 이가 기어이 빠지고 새로운 이가 자라는 상황도 생각해본다. 카드에서 죽음의 사신이 막 당도한 가운데, 백마의 발치에 나뒹구는 왕관과 함께 누워 있는 백발의 남자는 아마도 지상의 최고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죽음’은 재앙이었을 것이다. 영속적인 권력과 힘을 가지기 위해 필시 음으로 양으로 불로초를 찾아 헤맸을 것인데, 지금 이렇게 고이 누워계시니 어쩌면 그가 지닌 왕관의 무게를 벗어던지는 호상이 되기도 했을까. 한편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던 사람에게 ‘죽음’ 카드는 비로소 평안일 수 있다. 가스라이팅과 각종 폭력, 오해로 얼룩진 연인관계에서의 죽음은 편안한 해방일 수도 있다. 오래 악화되어온 불치의 지병을 앓는 사람에게도 어쩌면 스위스에서 개발되었다는 안락사 캡슐이 절실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요컨대 ‘무엇이’ 죽느냐가 관건이다.      



주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사신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몇 가지 인상적인 점은 아이가 죽음의 사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탄생의 순간과 좀 더 아까운 아이가 어른보다 더 죽음을 투명하게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이미 죽음 앞에 거의 맥을 못 추고 쓰러져가고 있다. 하지만 주교는 다르다. 두 손을 벌려 죽음의 사신을 한껏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데, 과연 이 카드의 다음 시퀀스에서 주교는 어떻게 될까? 나의 예상으로는 먼저 누워계신 왕 또는 황제처럼 주교 역시 머리에 쓴 관이 훌렁 벗겨진 채 황금빛 망토와 함께 스르르 쓰려져버릴 것 같다. 아마도 황제의 바로 옆자리에 비스듬히 눕지 않을까. 주교가 ‘나는 이미 오실 것을 알고 있었소’라고 말하는 듯 서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다소 종교적 오만으로 보인다. 마치 ‘죽음의 사신이여,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라고 번지수에 맞지 않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죽음의 사신은 과연 주교에게 자신을 비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할까. 죄송하지만 주교도 사람이고 구시대의 일원이다. 옆에서 아이가 어떻게 되든, 왕이 죽든 말든 사신이 탄 백마보다 한참 아래의 자리에서 성스러운 몸짓으로 죽음이 익숙한 듯 행동하지만 그 역시 죽음은 처음이고 아무리 사신에게 잘 보여봤자, 잘 죽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두 개의 탑 너머로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인생월드에 겸허히 입성한 기분으로     



죽음 카드는 전적으로 속세에 사는 인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끝을 암시하는 것 같다. 백마의 다리 너머로 보이는 강물은 여전히 유유히 흘러가고 있고, 쌩뚱맞게도 돛단배 한 척이 강 위에 떠 있으며, 나무도 풀도 초록으로 푸르다. 그리고 달 카드에서도 등장하는 두 개의 탑이 저 멀리 보이고 동쪽일 것으로 추측되는 그곳에서 이제 막 태양이 스멀스멀 떠오르려 하고 있다. 한마디로 태양은 죽지 않았다. 이 카드가 ‘죽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의 소멸’이라면 어떨까? 나무도 시들고 강물은 말라붙고, 태양조차도 수명을 다해 더 이상의 빛을 뿜지 않는, 심지어 죽음의 사신이 타고 있는 백마조차도 무릎을 구부려 앉아 마지막 숨을 내쉬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타로카드에 그런 궁극의 종말은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희망이자 아쉬움으로 남는다. 자연 속에서, 우주 안에서 사람이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출근길에 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폐업한 뒤 오랫동안 재임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을 지나치는데, 그때마다 보도블럭 사이사이에서 무섭도록 올라오는 잡초들의 생명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우리가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로변의 가로수조차 사람의 손길을 오래 거치지 않으면 제각기 아스팔트 안에서 뿌리를 거대하게 부풀려 모든 도로가 가로수에 의해 점령되지 않을까. 나 하나 죽는다 해도 그것이 세상의 끝은 아닐 거다. 잠시 사람으로 머무는 동안 기한을 알 수 없는 평생권을 부여받고 인생월드에 입장한 기분으로 그렇게 조금은 가볍고 산뜻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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