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번의밤 Aug 31. 2024

14. 절제 카드: 인생의 코어 근육이 무너진 이에게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이거슨 물이 아니여, 물로 보인다면 당신은 인간


사실 14번 절제 카드는 두근두근한 결과를 기대하는 이에게 그리 반가운 카드가 아니다. 보기에도 엄숙하고 진지해 보이는 대천사가 두 개의 컵을 들고 이리로 저리로 물을 옮기는 모습이 역동적이고 짜릿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저를 좋아할까요?’라든지 ‘사귈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에 이 카드가 나오면 마치 ‘진정해, 일단 너부터 중심을 잡아’ 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 뿐. 언젠가 한 동화에서 물이 든 컵을 쥐어주면서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려준 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물컵을 들고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정도 긴장감은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물을 옮길 수 있다. 만약 이 카드에서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 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벌써 물은 한 방울 두 방울 새다가 발치에 질질 흘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까.




이 컵에서 저 컵으로 세계가 흐른다

천사가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한 발은 물 속을 딛고 한 발은 지상을 딛은 천사가 들고 있는 두 컵의 형태는 동일하다. 결국 이쪽 컵에 있던 물이 저쪽 컵으로 갔다가, 다시 이쪽 컵으로 온다. 이는 마치 삶과 죽음 같다. 꿈과 현실 같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카드가 보여주는 상황의 근미래에는 과연 컵 속의 물이 이동을 멈출까? 그것은 인간이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 것 같다. 천사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만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루살이나 매미처럼 피고 지는 인간에게 ‘물이 언젠가 이동을 멈추나요?’라는 질문은 다소 주제넘을지도. 우주에 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채 22세기를 보지도, 날아다니는 택시를 타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컵에서 저 컵으로 세계는 흐른다는 점. 단지 물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고 죽은 것들의 존재 그 자체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탈탈 털어낸 만물의 정수다.           



인생의 코어가 무너졌다면

다시 천천히 컵 두 개를 들고


 

흔히 이 카드는 절제, 중용, 조화, 균형을 뜻한다. 언젠가 공포의 플랭크 자세로 스트레칭 수업을 받던 기억이 난다. 이미 코어 근육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나는 거울에 비치는 다른 날씬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큰 동경과 막막함을 느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실제로 코어 근육이 탄탄한 몸짱이라도 그가 인생에서 돌보지 않는 한두 가지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항구적으로 어떤 우주적 균형의 정중앙, 즉 영점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의 형체가 아닐 것이다. 심장이 뛰고 먹어야 하고,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치우쳐진 곳에서 정반대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걷기도 전에 뛰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이 카드는 컵에 든 물을 옮기듯 단 한 방울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행복만으로 채울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불행도 없지


 

삶의 균형감을 회복할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더 좋은 상태, 더 완벽한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둘레길 등산을 하다 보면 한동안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될 때, 나는 서서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분명 이 정도 내려갔을면 어마무시한 계단이나 언덕길이 나오겠지. 그러다 보면 정말 짠 하고 ‘너의 허벅지를 망쳐주지’라고 말하는 듯한 계단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금의 고통, 지금의 영광도 곧 지나가는 바람이다. 하지만 떠나간 바람은 휘휘 돌면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상태가 디폴트는 아니다. 그저 떠도는 것이야말로, 그 움직임 자체가 숙명이 아닐까. 

이전 14화 13. 죽음 카드: 인생월드 자유이용권 절찬리 판매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