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사실 14번 절제 카드는 두근두근한 결과를 기대하는 이에게 그리 반가운 카드가 아니다. 보기에도 엄숙하고 진지해 보이는 대천사가 두 개의 컵을 들고 이리로 저리로 물을 옮기는 모습이 역동적이고 짜릿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저를 좋아할까요?’라든지 ‘사귈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에 이 카드가 나오면 마치 ‘진정해, 일단 너부터 중심을 잡아’ 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 뿐. 언젠가 한 동화에서 물이 든 컵을 쥐어주면서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려준 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물컵을 들고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정도 긴장감은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물을 옮길 수 있다. 만약 이 카드에서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 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벌써 물은 한 방울 두 방울 새다가 발치에 질질 흘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까.
천사가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한 발은 물 속을 딛고 한 발은 지상을 딛은 천사가 들고 있는 두 컵의 형태는 동일하다. 결국 이쪽 컵에 있던 물이 저쪽 컵으로 갔다가, 다시 이쪽 컵으로 온다. 이는 마치 삶과 죽음 같다. 꿈과 현실 같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카드가 보여주는 상황의 근미래에는 과연 컵 속의 물이 이동을 멈출까? 그것은 인간이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 것 같다. 천사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만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루살이나 매미처럼 피고 지는 인간에게 ‘물이 언젠가 이동을 멈추나요?’라는 질문은 다소 주제넘을지도. 우주에 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채 22세기를 보지도, 날아다니는 택시를 타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컵에서 저 컵으로 세계는 흐른다는 점. 단지 물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고 죽은 것들의 존재 그 자체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탈탈 털어낸 만물의 정수다.
다시 천천히 컵 두 개를 들고
흔히 이 카드는 절제, 중용, 조화, 균형을 뜻한다. 언젠가 공포의 플랭크 자세로 스트레칭 수업을 받던 기억이 난다. 이미 코어 근육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나는 거울에 비치는 다른 날씬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큰 동경과 막막함을 느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실제로 코어 근육이 탄탄한 몸짱이라도 그가 인생에서 돌보지 않는 한두 가지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항구적으로 어떤 우주적 균형의 정중앙, 즉 영점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의 형체가 아닐 것이다. 심장이 뛰고 먹어야 하고,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치우쳐진 곳에서 정반대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걷기도 전에 뛰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이 카드는 컵에 든 물을 옮기듯 단 한 방울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있을 수 없는 불행도 없지
삶의 균형감을 회복할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더 좋은 상태, 더 완벽한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둘레길 등산을 하다 보면 한동안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될 때, 나는 서서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분명 이 정도 내려갔을면 어마무시한 계단이나 언덕길이 나오겠지. 그러다 보면 정말 짠 하고 ‘너의 허벅지를 망쳐주지’라고 말하는 듯한 계단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금의 고통, 지금의 영광도 곧 지나가는 바람이다. 하지만 떠나간 바람은 휘휘 돌면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상태가 디폴트는 아니다. 그저 떠도는 것이야말로, 그 움직임 자체가 숙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