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연애운을 볼 때 10번 카드 ‘운명의 수레바퀴’가 등장하면 타로카드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WHEEL of FORTUNE’이라는 강렬한 글자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카드 속 이미지에 꽂혀 ‘어머, 우린 운명인가봐’라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오늘 아침에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걷다가 내 오른발이 마침 작은 물웅덩이에 첨벙 하고 빠지는 것도 운명이다. 100미터 밖, 200미터 밖에서부터 서서히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오면서 마침 나의 오른발과 물웅덩이가 정확히 비슷한 타이밍에 만난 것이다. 또는 길을 걷다가 올리브영 가게를 보고 들어가 우연히 마주한 ‘발 뒤꿈치 각질 제거기’에 강렬한 니즈를 느끼고 구매했는데, 훗날 어떤 까탈스러운 사람이 나의 매끈한 발 뒤꿈치에서 매력을 느끼고 그것이 결정적인 ‘연애 사건’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필이면 머스크향을 싫어하는 사람과 소개팅을 했는데 나의 최애 향수가 강렬한 머스크향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손목, 발목 할 것 없이 요리조리 뿌리고 나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한참 전부터 예정되어 온 ‘맞지 않음’의 운명이다. 내가 행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에서 연료가 되거나 촉매가 되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여준다. ‘무지한 주체의 선택’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내가 죽어도 나뭇잎 한 장 시들지 않는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는 나무는 뿌리째 뒤흔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우리는 운명인가봐’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그래서 어떤 운명인가’가 남았다.
끝이 있는 쇼, 내가 만들지 않은 무대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의 중심에는 ‘TORA’라는 글자가 반 시계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2번 여사제 카드에서 여사제가 꼭 품고 있던 신의 섭리가 기록된 두루마리다. 여사제 카드에서 두루마리 문서를 한없이 줌인하면 10번 카드가 나올 수도 있겠다. 또한 시계방향으로 읽으면 ‘TARO’ 즉, 타로가 된다는 것도 오묘하다. 일단 세상은 수레바퀴가 돌 듯 돌아간다. 그리고 바퀴 꼭대기에는 스핑크스가 제법 서열이 높아 보이는 모습으로 검을 들고 앉아 있고, 좌측에는 뱀이, 우측 하단에는 붉은 빛의 아누비스가 등을 딱 붙이고 서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자를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아누비스가 제법 큰 비중으로 바퀴를 감싸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운명과 아주 밀접하게 속살을 맞대고 있음을 뜻한다. 카드의 네 모서리에는 천사, 황소, 사자, 독수리로 이루어진 테트라모프(Tetramorph)라 불리는 형상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데 사계, 4원소처럼 우주의 운행에 핵심이 되는 섭리를 나타낸다. 이 카드 어디에도 지금까지 바보, 여사제, 여황제, 황제, 교황 등이 활약한 것과 같이 카드를 이끄는 ‘인간’은 없다. 10번 카드는 일련의 인간사에서 일종의 중간 터닝 포인트 역할을 한다. ‘세상 속에서 즐기고, 지배하고, 지혜를 말하고, 열심히 내달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게 있어. 그것은 바로 매순간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었다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바퀴는 어째서 하늘에 떠 있는 겁니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카드는 큐피드의 화살 같은 로맨틱한 의미를 품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치명적인 화살까지도 카드 속 바퀴의 운행에 포함이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감지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흐름과 고저의 반복, 윤회 등을 나타내기에 카드의 배경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인 것이며, 이토록 구름이 중중한 것이다. 어떤 일의 성패를 물었을 때는 행운과 불운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를 가진다. 다만, 포커스는 내가 아니다. 매일 거울을 보며 ‘넌 성공할거야!’ 같은 자기 암시를 거는 사람도 이 카드 앞에서는 별 수 없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와 명예,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되뇌어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우뚝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삼라만상의 무한한 상태와 변화를 관장하는 수레바퀴가 지상에 놓여 있는 까닭에 우리가 그것을 만지고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두가 눈이 멀도록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은밀하고도 강력한 전제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처럼 언젠가 죽는다는 것 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드는 말한다. ‘네가 다행이든 안 다행이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
다 돌아오니까 잘 살아야 된다?
지금 당장 아프다는 누군가에게 ‘다들 너만큼 괴롭고 힘들게 살아’라는 말을 위로로 건네는 이들이 있듯이, 잘 살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 ‘모든 일은 다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나는 잘 굴러가던 수레바퀴의 리듬에 돌연 삑사리가 나면서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국 ‘내가 잘 돌려받기 위한 각성’은 어딘지 생각의 뿌리 부근에서 쿰쿰한 곰팡내가 난다. 물론 출발은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내 존재에 대한 긍정 내지는 확신이며, 내가 바로 서면 저만치서 비틀거리고 있는 타인이 마치 나의 과거 같아서, 또한 언젠가 찾아올 미래 같기도 해서 애틋하고 저미는 마음이 든다. 나는 출발이자 결과로서 매 순간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우러지고 있고, 다만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도 어떤 시간 속에서 살지를 정할 수는 있다. 지난 해 본가에 데려다 놓은 고양이를 볼 때마다, 유기된 남매 고양이 중에서 사정상 여동생 한 녀석만 데리고 온 것이 죄 지은 것처럼 내내 마음에 걸렸다. 오빠 고양이는 여동생을 데리고 간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까? 원망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 깊은 오빠라면 여동생을 그리워하면서, 곁에 없을지라도 잘 지내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리움도 아프지만 사랑이고 행복이니까. 그렇게 홀로 남아 입양을 기다리는 오빠 고양이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고 나니 더욱 마음의 온도가 높아졌다. 저체온증 수준이었던 마음에 따스한 김을 불어넣는 일, 그것이 하루하루의 행동으로 연결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