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연애나 일상 면에서 가슴 뛰는 결과를 기대하고 카드를 펼쳤을 때 은둔자 카드가 나오면 왠지 시무룩해진다. 주홍빛으로 일렁이는 마음에 찬물을 확 끼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발적 고행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거꾸로 매달린 남자’ 카드가 나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드에 mbti를 부여한다면 이 카드는 어쩐지 intj나 infj에 가까울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극도의 I라는 점. 생의 많은 부분에서 내가 속할 수밖에 없었고 취하고자 했던 자세도 어쩌면 은둔자 카드와 닮았다. ‘나는 왜 다르지?’가 아니라 ‘난 좀 다르지’의 마음으로 꾸준히 슬로우어답터의 외길을 걸어왔으니까. ‘지금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로 힘들어 죽겠으니 세상이 열광하는 드라마, 영화, 책들은 잠시 있어봐, 그것들이 알아서 각축전을 벌이다가 몇몇 가지로 추려지고 살아남게 된 콘텐츠라면 소비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대체로 고독이었고, 자의식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참을 수 없는 유한성에 대한 절망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 쓴 책이나 생전의 흥얼거림이 그대로 담긴 글렌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것들이었고 지난했던 20대는 그렇게 까탈스러운 듯 무심하게 어우렁더우렁 흘러갔다. 그런데 그때 꽉 쥐고 있었던 별은 지금 어디로 갔지?
삼고초려 해도 안 나오는 제갈공명 스타일
카드 속 은둔자는 눈 덮인 설산으로 쫓겨온 것이 아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차분히 밟아가다 보니 어느덧 민가도 없고, 굴뚝에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는 설산에 당도한 것이다. 언젠가 존경하는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발 앞서가면 세상이 몰라. 그런데 반 발을 앞서가면 박수를 치지.” 그렇게 치면 은둔자는 필시 두 발 정도는 세상을 앞서간 것 같다. 스스로의 걸음이 이끈 광막한 설경에 놀라 어쩌면 ‘이렇게 멀리 올 건 아니었는데...’ 하면서 당황하고 있을지도. 은둔자의 시간은 일종의 숙성기 또는 배양기로 아직 면벽 수행이 덜 끝난 고승의 주저함과도 닮았다. 이런 분에게 ‘세상에 나와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아직 빛나는 진리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일 테니까. 등불 속에서 빛나는 별을 껴안거나 그것을 하늘로 돌려보내지 않고 조용히 거리를 두듯 팔을 뻗어 내밀고 있는 것만 봐도 은둔자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가만 보자, 이것이 땃땃하고 적잖이 빛나는 것 같긴 한데, 사람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발광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 설산이 녹아 최초의 꽃망울이 피어오를 때쯤, 그때 은둔자는 과연 살았을까 죽었을까.
소품을 통한 프로파일링
은둔자가 든 지팡이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정직하고 소박하다. 반지의 제왕에서 각성한 간달프가 들고 있는 ‘있어 보이는’ 하얀색 지팡이가 아니다. 은둔자는 애초에 선택받거나 신성한 힘을 부여받은 자가 아니라 삶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다가 그곳에서부터 출발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길게 난 수염은 그가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이 거울을 볼 정신도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마저도 백색 수염이다. 멜라닌 색소가 마르고 닳을 때까지 묵묵히 수행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모자가 달린 회색 로브는 눈덮인 산과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자신을 드러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실마리가 있다. 손에 든 등불 속에서 빛나는 육각형의 별은 일종의 초월적 깨달음이다. 하지만 틀 속에 갇혀 있다. 이는 아직 세상에 내보이기에는 시기상조의 진리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은둔자의 체형으로 보아 잔뜩 웅크리고 골몰한 탓에 승모근이 잔뜩 뭉쳐 있어 정신적 깨달음에 비해 신체 밸런스는 상당히 떨어진 상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일종의 짐이자 축복이기도 한 별빛을 적당히 처리하고 난 뒤에 장기간에 걸친 트레이닝이 필요할 것 같다. 마치 은둔자의 시기를 지났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내가 요즘 어설픈 걸음으로 헬스 PT를 받으러 다니는 것처럼.
어딘가에 있을 범상한 최고에게
진리의 숙명이란 대체로 그것이 전파될 수 있는 시기가 오기까지는 차가운 설산에 묻혀 있을 운명이라는 점 아닐까. 하지만 은폐된 진실이 끝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전지적 관찰자 입장에서 진실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아끼는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나의 일상’에서는 사라졌지만 어느 후미진 골목이나 지갑을 습득한 사람의 손에서 그 지갑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하고 누군가에 대해 얘기하는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건 너무 편협하고 순진한 표현 아닌가요?” 하고 반문한 적이 있다. 어쩌면 무대 위의 그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기에 세상에서 약속된 ‘최고’일 수는 있어도 실직적으로 가장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어느 낯선 도시의 아파트 1209동 306호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아웃사이더란 세상과 다른 것을 의식적으로 쫓는 사람이 아니라 쫓다 보니 세상과 달라져 있는 사람이다. ‘난 유명한 건 안 봐’라는 식의 강박적 아웃사이더는 이해할 수 없는, 애초에 다른 주파수 대에서 유리감과 고독감을 느끼고 있을 많은 수많은 은둔자들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