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사람을 기다리기만 하는 건지, 자기만의 편안한 적막을 즐기는 건지 알 수 없는 고양이를 보면서 문득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라는 사명이 있다. 너는 왜 고양이로 태어났을까? 고양이로 태어날 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애초에 이 질문은 인간으로 태어남 이전의 ‘나’를 가정하고 있어서 어딘지 비대한 자의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차라리 데카르트의 주문처럼 코기토 에르고 숨, 하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무언가가 막연히, 동시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기는 편이 낫겠다. 또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왜 나인가’라는 질문이 더 고도화된 무엇인지도 모른다.
국적이 의미가 없을 때 ‘나는 왜 한국에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뒷전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어깨동무를 하지만 고장난 기계처럼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 못된 말들을 삼키기도 하고 감동을 되새김질하기도 하고, 오래전 기억을 소환해 목놓아 울기도 하는 내가 이 우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아니 ’현상‘이 참을 수 없이 고독하고 답답했다. 이제 나는 제법 많은 현실적 영역으로 질문을 확장하고 있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나는 왜 아이를 낳고자 하는 바람이 없을까’인데 거의 본능으로 여겨지는 종족보존의 욕구가 왜 퇴화되어 있는 것인지, 지나온 인생사를 돌이켜 봐도 강렬하게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 걸 보면 모성애의 많은 부분을 고양이 양육을 통해 발휘하고 있거나, 연애라는 형식의 빈자리에 항상 돌봐주고 싶은 사람을 앉혀놓고 자식처럼 사랑해서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왜’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해답을 찾든 정답을 찾든, 근에 가까운 무언가로 내 삶을 지탱하면서 나름의 결론을 내고 ‘어떻게’로 나아가야 한다. 사는 일이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고민하다가 어느덧 밀물처럼 차오른 ‘이 나이에 마땅히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 것들’을 놓쳐버리면 안 되니까. 연말정산의 원리도 모르고 쉰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동시에 삶에서 상식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순수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도 있다. 순수는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며, 애초에 이런 불안 자체가 더 이상 내가 순수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항상 원석같이 뭉툭하지만 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것 같은 흑수저 가수지망생을 응원하게 된다. 혁명은 변방의 바람에서부터 불어온다는 말,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 나왔던가. 나의 삶은 언더그라운드의 어디쯤, 마이너하고도 마이너한 구역에서 바람에 스치는 모래알갱이처럼 배회하고 있다. 때로는 한없는 익명의 자유가 버겁고 때로는 온 세상이 한줌이라는 생각에 갑갑하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실상 가만히 있어도 지구가, 태양이, 우주가 나를 조금씩 돌려준다. 이 세상의 끝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가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