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싸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스스로 곱씹듯 허둥지둥 너무 많은 문장을 생산해 낸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때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보이스톡을 하자는 말에 딱히 거절을 하기가 애매해서 시작된 통화가 2시간 반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말들이 변명 같았고 겸손은 작위적이었다. 심각한 것은 작위성 자체가 체화된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 누구보다 민감한 촉수를 보유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저는 제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아요’ 같은 말을 해대니 나는 그저 ‘네’, ‘그렇죠’, ‘아하’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한 번 대화의 바통이 넘어가면 5분이고 10분이고 간에 특유의 고상한 호들갑이 이어졌다. 대화 중반 이후부터는 아예 머리를 싸매고 들었다. 어차피 내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그렇게라도 시간을 때웠다.
거물급 뮤지션이 내한했을 때 안내를 했는데 자기는 사인 한 장 받지 않았다는, 결론적으로 으스대는 듯한 그의 말로 미루어보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이제는 인풋보다 아웃풋의 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안정적인 삶’을 암시하는 사실들. 그냥 대놓고 자랑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 연상의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나는 아웃풋의 희생양이 될 때가 많다. 자신 있게 지난한 흐름을 끊고 들어가서 그쪽 사정은 그렇고 나는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밝혀야 되는데 어느 순간 고삐가 끊어지면서, ‘아, 이 사람은 상대가 나라서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저 청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가 빨리든 두통이 시작되든 영락없이 청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밤에 발작적으로 수다를 떨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 코를 풀기 위한 휴지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사람이구나.
그에 의하면 얼마 전에 대화를 나눈 사람이 너무나 과하게 자기 어필을 하고 자랑을 하는 바람에 식겁을 하고 도망쳤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즉시 나는 “지금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은 나르시시스트 같았다고 했는데 나는 “당신 역시 ’역나르시시스트‘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데칼코마니처럼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나, 타인을 고려하는 척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한 궤를 돌고 있는 한 쌍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무엇이 너무나 싫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무엇무엇‘이 그 사람의 일부인 경우를 자주 겪었다. 내가 싫어하는 선민의식과 귀족주의 같은 것들이 또 나의 일부이기도 한 것처럼.
최근 자신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어떤 분을 사장으로 모신 적이 있었다. 심각한 알콜중독에 약물남용까지 하는 분이었는데, 좋았던 점도 있지만 분명 나 자신이 코 푼 휴지가 된 것 같은 무수한 시간들이 있었다. 회식이랍시고 앉혀놓고 사회 비판, 업계 비판, 자신의 무용담, 날것 같은 생각들을 난사하는 통에 듣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돌부처가 되곤 했었다. 그러나 돌연 스스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수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부끄러움과 면구스러움은 온전히 또 직원의 몫이었던 시간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인연이라고 근 5년 가까이 직원 노릇을 했으니, 언젠가 퇴사 후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연락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다시 개미지옥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중국의 공자는 말년에 전국을 떠돌며 가르침에 열중했다고 하는데, 구름같이 모여든 제자들 사이에서 혹시 ‘꼰대네, 꼰대야’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까.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통화가 계속되는 내내 ‘이 시간이 버려지는 시간은 아닐 거야. 이 사람에게서 뭔가 배울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 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어서 두 시간 반을 버텼다. 얼추 다 듣고 나니 그에게서 배운 점이라면 ‘나는 그렇게 늙지 않겠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을 선사하고야 말 것인데, 노화의 속도를 줄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아웃풋 전문 독불장군이 되어가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