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아침, 사무실 말고 공원
지난달, 18년 동안 한 일을 그만뒀다. 내 이름 앞에 따라붙던 ‘방송작가’를 떼어내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그만둬야지 하는 마음이야 수시로 찾아들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한 건 1년 정도 된다. 그만둔 이유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곱씹어 보다가는 순식간에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를 테니 오늘은 접어두고 싶다. 겨우겨우 그 스트레스와 작별한 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달라진 아침
일을 그만둔 후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매일 하던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였지만 나는 늘 출근을 했다. 쳇바퀴 돌 듯 일어나서 씻고, 한참이나 고민하고는 늘 입던 옷을 입고, 차를 타고 늘 달리던 길을 달려 일터까지 가는 오래된 반복. 이제는 그 오래된 반복을 그만해도 됐다. 일단은 느지막이 일어나 하고 싶은 걸 했다. 나름 루틴을 정해봤지만 한 달 정도 지켜보니 나는 내가 정한 루틴을 잘 지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미지근한 물 마시기 – 사과 당근 주스 마시기 – 1시간 아침산책 or 헬스장 GX – 책 읽기 – 글쓰기 – 한 번도 안 가본 곳 다녀오기 등등등이 있었으나,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눕거나 쉬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했다. 그래도 아침산책 루틴은 지켰다.
사무실 말고 공원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걸쳐 입고, 당연히 화장도 안 하고 집을 나서는 기분이 좋았다. 운전을 하지 않고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동네 공원까지 갔다. 넓은 공원엔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만둔 시기가 가을이라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겨울이었으면 좀 스산하지 않았을까, 여름이었다면 더워서 산책할 생각도 못했겠지 하면서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도 올려다보고, 오가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유모차 끌고 나온 아이 엄마, 라디오 크게 켜고 걷는 할아버지, 아침부터 할 말이 참 많으신 어머님들까지. 평일 아침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대게 이런 분들이구나 싶었다.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평온한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까. 지금쯤이면 사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빈 화면에 무수한 글자들을 만들어 내느라 미간에 주름이 잔뜩 그려져 있겠지, 오고 가는 말들 사이에 피로와 긴장을 고스란히 받으며 회의를 하고 있겠지, 누가 어쨌네 저쨌네, 이해가 되네 안 되네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스트레스 지수를 올리고 있었을 텐데, 지금 여기 알록달록한 가을 속에 앉아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홀가분했다.
내가 모르는 동네의 시간
돌아오는 길에 만난 동네의 활기도 좋았다. 내가 사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아침의 동네 풍경은 내가 몰랐던 모습이었다. 내가 모르는 동네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도 새로워서 설렜다. 슈퍼에서 물건을 내리고 받는 모습이, 김밥집에서 열심히 김밥을 마는 모습이, 안경점 아저씨가 부지런히 가게 앞을 쓸고 닦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덩달아 활기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활기찬 나의 아침 산책은 두 번으로 끝났다. 곧바로 날씨가 추워져 집 밖에 나설 엄두가 안 나서 간단하게 포기했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으니 좀 안 해도, 좀 못 해도 상관없으니까.
이 평온함이 얼마나 갈까 사실 두려운 맘도 든다. 갈수록 주머니는 비어갈 테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기어이 오겠지만, 일단은 퇴사 후의 일상은 설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