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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Dec 07. 2020

퇴사 후 삶을 씁니다.

당분간은 좀 게을러집시다

퇴사 후 2주 간은 매일 약속이 생겼다. 못 다 한 만남이 줄줄이 이어져 있어 점심 저녁으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사실 정신이 없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숨이 찼다. 다행히 내 인맥은 2주 정도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어느 정도 적당히 마무리가 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고요한 하루가 찾아왔다.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제, 내 의지와 내 마음만이 지배하는 하루하루다. 내 마음대로 보내는 내 하루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두 번째는 나갈까 말까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 하루가 다 갔나 당황하기. 오늘은 이 세 가지에 대한 백수의 변을 풀어본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나는 아침잠이 많다. 새벽 출장이 잡히면 일주일 전부터 가슴이 뛰고, 괴롭고, 일을 그만둘까 말까를 고민할 정도로 아침잠이 포기가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늘 출근이든 약속이든 잘 수 있는 만큼 자고, 딱 1시간 전에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18년 동안이나 해 온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일상은 늘 규칙적이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이 날마다 널뛰기를 하다 보니 어느 날은 새벽 6시, 또 어느 날은 10시에도 출근을 했다.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날마다 달랐지만,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출근도, 해야 할 일도, 약속도 없는 날에는 마냥 누워있었다. 누군가 정해준 출근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으니 기상시간은 온전히 내 몸과 내 마음의 몫이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쌀쌀해지는 날씨엔 포근한 이불속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은가. 특히 아침에는 더더욱 말이다. 꼼지락꼼지락, 뒹굴뒹굴,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 일어난다. 그리고 미지근한 물과 함께 엽산, 유산균을 챙겨 먹고 사과와 당근을 갈아 마신다.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기도 하고, 오늘 하고 싶은 일을 다이어리에 끄적끄적 적어보기도 한다. 그렇게만 했는데도 점심시간이 훌쩍 넘는다. 시간을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거였다.   


나 지금 진지하다! 나갈까? 말까? 

나는 집을 좋아한다. 편한 옷 입고 편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집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 밥도 웬만하면 집에서 먹는 걸 선호한다. 만들어 먹거나, 시켜 먹거나, 사 와서 먹거나 등등.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일을 하러 나가고,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서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모조리 방전하기도 했던 쳇바퀴에서 가뿐하게 내려선 후 진지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나갈까? 말까?"


아침 산책을 나갈 때도 그랬고, 동네 커피숍에 갈 때도 그렇고, 운동하러 나갈 때도 나는 나갈까? 말까?를 몇 번이나 고민한다. 왜냐하면 나가기 싫으니까. 그런데 왠지 나가야 할 것 같으니까. 지난밤에 분명히 내일은 동네 커피숍에 가서 두 시간 정도 책을 읽고, 30분 정도 산책을 하고 와야지 다짐했지만 막상 아침이 되면 다시 고민한다. 집에서 읽어도 되는데, 집에서 홈트 하면 되는데 왜 굳이!!! 그래도 나가면 환기가 되니까, 바깥바람이나 쐬자 하면서 옷을 입고도 나갈 마음이 100% 들지 않는다. 그냥 옷 입은 수고가 아까워 겨우 나갔다 들어온다.     

언제 하루가 다 갔나 당황하기

해가 짧은 게 문제다. 다섯 시만 지나도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려고 준비를 하니 하루가 빨라도 너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거다. 점심 먹고 잠깐 놀고, 잠깐 졸고, 잠깐 멍 때리고, 또 잠깐 책장 몇 번 넘겼는데 방안에 어둠이 찾아들다니. 하루가 이렇게 짧았었나 싶다. 예전엔 원고도 쓰고, 섭외도 하고, 회의에 답사에 촬영 구성안까지 써도 하루가 다 안 지났던 적이 많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만 지나가던 낮의 시간과 달리 밤의 시간은 체감 상 3배 정도는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저녁상을 물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왔는데도 겨우 8시다. 집에 와 또 하니 멍하니 있다가 내가 하는 일이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거나, 넷플릭스의 바다에서 볼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거나, SNS 속 지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남들은 다 바쁘게 사는데 나만 이렇게 시간을 써도 되나,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마음에 덜컥 불안해진다.


"괜찮아 그만둔 지 얼마나 됐다고 괜찮아 에휴"


다독임 뒤에는 뜻 모를 한숨을 이어 붙이고, 그렇게 나의 하루는 마무리된다.     


일상에서 방황 중

아직은 내 일상의 규칙들을 천천히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루틴을 정해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지,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지내는 게 나을지, 일주일에 사흘은 규칙대로, 나머지는 내 멋대로 지내보는 건 어떨까... 생각 중이다. 얼마나 갈지 모르는 자유인의 시간을 사실은 제대로 잘 보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뭘 어떻게 하는 게 잘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지내면 되지. 뭘 잘 지내려고 애를 쓰나' 싶다가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도 뭔가 잘해보고 싶다는 들썩거림이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지금 일상에서 방황 중이라고 말이다. 마흔한 살과 방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는 모르겠지만, 마흔한 살의 초겨울은 자유로운 방황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당분간은 좀 게을러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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