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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Dec 09. 2020

퇴사 후 삶을 씁니다.

인간적 거리두기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이다. 내 인간관계는 넓고 얕기보다는 좁고 깊은 쪽에 더 가깝다. 또 다른 특징 하나는 그 좁고 깊은 관계 속에서도 나는 ‘지금’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선택한 것은 아니다. 좁고 깊은 게 편해서, 지금에 집중하는 게 에너지가 덜 쓰여서, 그리고 이런 방식이 스스로 크게 부대끼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흘러왔을 뿐이다. 


지금에 집중한다는 것은 지금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에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동네 친구, 회사 친구, 교회 친구 등등 내가 만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 그런 사이가 깊어지면 나는 그 관계에 집중한다. 그 사이, 예전에 집중했던 관계들과는 조금씩 거리가 생기게 된다. 자주 연락을 하지 않고, 애써서 만나지 않고 그저 마음 한 구석에 그들을 가만히, 조용히 둔다.     


그들과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최근까지는 회사 친구들에게 집중했다. 가장 자주, 가장 가깝게 만나는 이들이었고 내 일상의 가장 많은 것들을 나누던 친구들이었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두고 나니 그들과 공유할 것들이 점점 줄고, 그러다 보니 연락도 뜸해지고 있다. 천천히 적당한 거리가 생겨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두었던 관계들을 하나 둘 꺼내왔다. 옆자리에 앉아 고민을 나눴던 예전 동료를 만나고, 주일마다 만나서 차를 마시고 놀던 교회 친구를 만나고, 아이 둘을 키우느라 바쁜 대학 친구를 만났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니 그동안 못 봤던 ‘나의 좁고 깊은 친구들’을 만난다는 핑계였지만, 어쩌면 나는 다시 집중할 인간관계가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소통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SNS를 보다가 재미난 소식이 눈에 띄거나, 마트에서 맛있는 과자를 발견했을 때, 귤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아 나눠 먹고 싶을 때, 저녁 메뉴가 맘에 들어 자랑하고 싶을 때, 산책 중에 하늘이 너무 예쁠 때 등 나는 일상 곳곳에서 무언가 함께 나누고 싶은 순간에 친구를 떠올린다. 습관처럼 회사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공유할까 하다가도 바쁠 텐데 뭘... 하고 말아 버린다. 그렇다고 가끔 만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사소한 것들을 나누기에는 조금 뜬금없으니 또 말아버린다.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를 주고받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럴 때 보면 나는 엄청나게 소통이 필요하고 간절한 사람 같기도 하다.       


일을 그만둔 건 여러모로 내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고, 지금도 가져오고 있다. 이제는 내가 애쓰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관계가 없어졌으니, 애를 써서 누군가 만나든 아니면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사실 아직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정해둔 건 없다. 지금까지도 인간관계에 대해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온 게 아닌 것처럼 아마 앞으로도 나는 자연스레 다가오고 멀어지는 관계들을 그냥 두고 볼 것 같다.   

  

속 시끄러운 만남은 이제 그만 

애를 쓴다고 누구와 더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춘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좋은 사이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고, 그 시간들을 누리고 싶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몇 마디 안 나눴는데도 속이 시끌 시끌 부대끼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으면 된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이 부대껴도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새롭게 발견한 개운함이다. 만나봤자 속만 시끄러울 게 뻔한 만남들은 이제 뒷일 생각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게 됐다.     


나를 돌보는 시간 

체한 것처럼 불편한 만남들을 멀리할 수 있다는 점, 반면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나던 이들과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는 점. 퇴사는 나의 좁고 깊은 인간관계 일장일단을 안겨줬다. 그리고 나는 이 적당한 거리두기에 익숙해져 보려고 한다. 왜 그만두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나를 돌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했었다. 나를 돌보기 위해서 적당한 거리두기는 필요해 보인다. 혼자 있는 시간, 혼자 보내는 순간들을 통해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어려워하는지,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한지, 하루 중 어떤 시간에 가장 마음이 설레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지,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인지 알아가 볼 참이다.    


적당히, 인간적으로 누군가들과 나는 거리두기를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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