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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Jan 27. 2021

퇴사 후 삶을 씁니다.

무기력을 이겨낼 그때 그 순간들

정신없이 새해 한 달이 지났다. 일을 하지 않는 나에게도 시간은 쏜살같고, 하루는 빨랐으며 정신 차려보면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그 사이에도 꼬박꼬박 무언가를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고, 자주 계획과 어긋났고, 가끔 새로운 것들을 해낼 때면 작은 성취감 같은 것들을 느끼곤 했다. 온전히 내 의지와 계획으로 꾸려지는 ‘하루’는 책임감, 부담, 설렘 같은 것들이 몇 배는 크다. 부모님, 학교, 그리고 직장까지 늘 어딘가에 매여 살면서 누군가 정해준 대로,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게 익숙했다. 갑작스레 맞는 자유로운 하루하루는 아직 낯설어서 나는 여전히 헤매는 중이다.     


글을 쓰는 일도 규칙적이 되려면 누군가 정해놓은 마감기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수동적인 사람이었나... 40여 년 만에 나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중이다. 뭔가를 하면서 보내는 하루, 뭐라도 하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갖은 애를 써야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병원에 간다거나 하는 일정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있다. 훌쩍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지만 이 시국엔 그런 맘도 집어넣어야 하고, 카페나 도서관에 가는 것도 제약이 생겼으니 내 생활 반경은 더더욱 집에 묶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문득문득 무기력해지는 순간들도 꽤나 많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떠올려보기로.     


서두가 길었다. 오랜만에 쓰는 이 글은 좋아하는 순간들에 관한 것이다. 설렜던 그 순간들을 하나둘 쓰다 보면 무기력과 심심함도 잦아들지 않을까. 글과 함께 그때의 감정들이 천천히 살아나지 않을까. 그때 그 순간들을 기록해본다.     


길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샤워 후 침대에 눕는 그 순간

깨끗하고 평온하며 마음이 탁 풀리는 그 기분     


겨울날 길을 걸을 때, 적당히 차가운 바람이 얼굴이 와 닿는 그 순간

차갑고 명료하며 개운하고 상쾌한 그 기분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며 시원한 보리차를 마시는 그 순간

땀과 열기가 가라앉아 시원함만 남는 그 기분    


신호대기 중, 낙엽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그 순간

그 어느 순간보다 가을이 충만한, 말할 수 없이 설레는 그 기분     


비 오는 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빗소리를 듣는 그 순간

여기저기 치여 피곤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해지는 그 기분    


바쁜 하루 중 “커피 한 잔 할까?”라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복잡한 것들 잠시 밀어둬도 되겠다 싶은 안도감이 찾아드는 순간    


어느 봄날, 바람을 타고 온 아카시아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그때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 제법 괜찮은 동네에 와 있구나 느껴지는 순간    


창가에 올려둔 식물 위로 햇살이 찾아들 때

푸른 잎과 고운 꽃들이 살며시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     


소음 없는 조용한 집에서 촛불 하나 켜 뒀을 때

캔들 홀더 속에서 작게 일렁이는 불빛을 보고 있는 순간     


따뜻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열어둔 창으로 이제 막 시작된 아침의 활기를 들으며

그날의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서점에 갔다가, 장을 보다가, 인터넷을 뒤적이다 

‘이거 00 이가 좋아하겠다’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별 것 아니지만 마음을 전할 무언가가 생기는 그 순간이 나는 좋다.    


계절이 돌아오면 느끼게 될 설렘, 날씨가 바뀌면 찾아올 설렘, 내 일상이 계속된다면 언제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이다. 무기력해질 때면 하나씩 꺼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까지 햇살이 좋다가 내일이면 눈비가 찾아온다니, 이제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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