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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Feb 17. 2021

‘일’보다 앞선 ‘말’

퇴사 후 삶을 씁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전화를 받은 건 기차역에서였다. 표를 끊으려고 긴 줄 끝에 서 있을 때였다. 합격했으니, 다음 주부터 출근을 하라는 전화였다. 나는 내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날 기차역에서 내가 좋아하며 웃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제 막 스물네 살이 된 1월 초, 나는 내 인생의 첫 직업을 갖게 됐다.      


일은 복잡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호했고, 정답을 알기 어려웠고, 관련된 사람과 상황이 많아서 늘 변수가 존재했다. 매번 다른 변수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데는 정해진 기한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소심했고, 서툴렀고, 정확하지 않은 말들과 훈계로 자주 혼났지만 하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야근에 밤샘, 주말까지 일을 하며 하나씩 몸에 익히고, 마음에 새기면서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갔다. 5년 정도 지나니까 자신감이 붙었고 10년이 넘어가니 여유도 생겼다. 매번 다른 변수에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도 생겼으며, 적당히 즐길 줄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매번 긴장되고 매번 이런저런 걱정들이 따라와 예민함은 늘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일은 나에게 있어 늘 충만했다.   

   

그런데, 그렇게 반짝이던 나의 일이 어느 순간 시들시들해졌다. 내가 애써 지켜온 ‘일’보다 어느 순간 ‘사람’이 앞서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말’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말에 치이고, 말에 지치고, 말에 얻어맞는 날들이 많아졌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열심히 퍼 나르고, 열과 성을 다해 전달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안 들으면 되는데 괜한 호기심에 귀를 한 번 열고, 피곤해하면서도 알고는 있어야지 하며 또 귀를 열어 듣고 만다. 내 앞에서 나와 친한 이들의 능력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 말을 듣고만 있어도 친한 이에게 미안해졌고, 어딘가에서 나도 저울에 올라 휘청거리고 있겠구나 싶어 몹시 불쾌했다. 어느 순간 일이 아닌 말이 먼저가 되고, 마치 그 말이 더 중요한 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평가하고 비난하고 동조를 강요하는 말들이 넘쳐났다. 사실 나도 그 말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때론 그 말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나도 그저 그런 마음 찝찝한 말들을 하며 억울함이나 분노를 털어내려 했으니까. 결국은 그 안에서 나도 그저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일은 시들해졌고, 말은 기세 등등해졌다. 몇 번이나 털어내고 마음을 다잡아도 지친 마음이 쉽게 회복되질 못 했다. 말이 쏟아졌던 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에 치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책하고, 주워 담지 못 할 말들이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와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괴로웠다. 화가 나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쏟아냈던 말들이 너무 못났고, 형편없어서 부끄러웠다. 나의 못난 말들은 다 나에게로 돌아와 걸림돌이 되고 마음의 생채기가 됐다. 나에 대해 평가하는 말,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말, 물건 던지듯 툭툭 던지고 가는 말, 책임은 미루고 성과는 떠안는 말들 또한 마음에 쌓였다.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고 넘기고 잊어버리려고 애도 썼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별난 건가, 사회생활하면서 이 정도 말들은 다 오가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자꾸만 소화되지 못한 말들은 쌓였다.    

  

그렇게 남들에게 들었던 말, 내가 했던 말을 곱씹고 곱씹는 날들이 많아졌다. 집에 와서도 피곤했고, 마음이 편치 못 했다. 결국 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내 잘못이라고 나를 돌아보고 감정을 마무리해도 다시금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일’의 자리에 ‘말’이 들어와 마구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반짝이던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일은 풀이 죽고 시들시들해졌다. 십수 년 전 기차역에서 웃던 내 얼굴을 잊은 지도 오래였다.   

   

결국 나는 마음을 지키기로 했다. 시들해진 일을 더 이상 붙잡을 마땅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 나는 평화롭고 싶었다. 일을 떠나, 사회적 관계를 떠나 혼자가 되더라도 나는 온전히 평화롭고 싶었다. 이토록 단순한 이유가 18년 동안 지속해온 일을 그만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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