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든 사이

마흔한 살, 시험관을 기록합니다. (네 번째 이야기)

by 여름바람

아찔하고 짜릿했던 ‘주사’와의 만남이 끝나면, 다음 단계의 문턱에 가까스로 다다르게 된다. 과배란 주사로 배는 멍이 들고, 난포가 자라면서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멍들어 부푼 배는 이제 곧 난자 채취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초음파로 난자의 개수와 대략의 상태를 살펴보고 채취 날짜를 정하게 된다. 수면마취로 이뤄지는 거라 가족과의 동행은 필수다. 남편이 함께 올 수 있는 토요일 이른 아침에 난자 채취를 하기로 했다.


A4용지 한 장에 빡빡하게 적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전달받고 두근거리는 맘을 붙잡고 그날을 기다린다. 전날 12시부터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2시간을 달려 병원에 도착하면 남편에겐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나에겐 긴장의 시간이 열린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항생제 주사를 맞고 수액을 맞으며 멍하니 내 순서를 기다린다. 수술실 내부의 작은 대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보면, 나와 같은 상황의 여러 동지(?)들을 마주하게 된다. 다들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조용히 자신의 순서만 기다리고 있다. 같은 공간에, 같은 마음으로 앉아있는 동지(?) 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저분에게 부디 좋은 소식이 있길, 그래서 다음번에 여기서 다시 만나지 않길... 하고 혼자만의 응원을 보낸다.


내 이름이 불리고, 밝지만 왠지 서늘한 느낌의 수술실에 들어가 눕는다. 아직 마취는 시작도 안 했는데 눕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기분이다. 눈을 감고 있는데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담당 교수님이 도착하고, 마취가 시작되고, 어느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만다.


분주한 말소리, 코끝에 맴도는 소독약 냄새, 저릿한 아랫배 통증이 동시에 느껴지면서 정신이 든다. 나는 회복실 침대에 누워있고 첫 번째 난자 채취는 그렇게 끝이 났다. 몸을 조금씩 뒤척이다 보면 금세 간호사 선생님이 눈치를 채고 다가온다. 가볍게 상태를 체크하고, 거즈를 빼낸다. 차라리 깨어나기 전에 빼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낌이 몹시, 매우, 상당히 이상하다. 그러고 나면 내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성숙 난자 몇 개, 미성숙 난자 몇 개... 내 몸에서 총 몇 개의 난자를 채취했는지 알려준다. 5개, 8개, 10개, 12개... 나는 채취를 거듭할수록 보다 많은 난자를 내 몸에서 뽑아냈다. 개수가 많아질수록 아랫배 통증은 조금씩 더 심해졌다.


난자 채취를 하고 온 날은 온종일 침대에 누워 푹 쉬었다. 어디 긁히거나 부딪힌 상처도 며칠 동안 아물지 못하고 오래가는데, 난자 채취도 결국엔 내 몸 어딘가에 상처가 남겨졌을까 싶어 그냥 푹 쉬고 또 쉬었다. 묵직하게 찌르는 듯 한 통증이 올 때면 괜히 내 몸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마음은 또 어딘가 모르게 홀가분하기도 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라 그런 걸까. 채취된 난자는 수정을 거쳐 배아가 되고 이식의 단계까지 간다. 하지만 여기서도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 난자는 살아남아야 수정이 가능하고, 수정해서 배아가 돼서도 살아남아야 하며, 그 살아남은 배아 중에서도 유전자 검사에 통과해야 이식에 적합한 배아로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눈 질끈 감고 주사를 견뎌야 할 일도, 아침저녁으로 널뛰는 감정을 다독일 일도, 걷고 걸으며 건강을 지켜야 할 일도 없다. 내 몸을 떠난 난자가 부디 잘 살아남길, 건강한 배아로 돌아오길 바라고 바랄 뿐이다. 아이를 만나는 일은 이렇게나 멀고 험난한 여정이다. 그러니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얼마나 귀한가... 인류애적인 너른 마음으로 마주하는 모든 사람을 바라보며, 가져본 적 없는 모성애가 이런 건가 괜스레 짐작해 보기도 한다.


나는 과연 다음 단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그렇게 긴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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