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열심

마흔한 살, 시험관을 기록합니다. (여덟 번째 이야기)

by 여름바람

전화를 받은 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피검사 수치가 823이에요”


지난번 293보다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임신이었다.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뭔가 혼자서 지금의 기분과 상태를 곰곰이 되짚고 싶었다. 창밖으로는 건물과 들판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고, 버스 안에서는 오후의 활기가 느껴지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신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시도들은 ‘임신’이라는 두 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런 순간을 맞으면 어떤 기분일까 몇 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명확하지 않은 감정들이 마음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매우 들뜨거나 기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리고 단순히 임신이라는 그 말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이식 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집어 들었다. 이식이 끝나고 하루하루 테스트기로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임신이라는 말을 듣고 그날 테스트기를 사용했고, 두 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난임센터를 찾았다.


“축하해요”


담당 교수님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줬다. 이식한 두 개의 수정란 중 어떤 게 착상됐는지 모르겠다며 함께 기뻐해 주셨다. 교수님은 간단한 주의사항과 챙겨 먹어야 할 약, 여전히 계속해서 맞아야 하는 배 주사와 엉덩이 주사에 대해 덧붙여 주셨다. 진료실을 나오던 내 표정을 누군가 봤다면 분명 임신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마음도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꽤나 어려운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당장 알 수 없는 내일이 아닌 너무도 분명한 ‘오늘’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 마음이 정말 홀가분했다.


살면서 뭔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되짚어 봤다. 나는 그다지 열정이 많은 스타일도 아니고, 뭔가에 미쳐서 정신없이 빠져드는 타입도 아니다.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가끔 뜬구름 같은 내일을 내 맘대로 상상해보는 걸 좋아하는 소소한 사람이다. ‘열심’이라고 하면 대학 때 좋아하던 학교 방송국 일을 시험 제쳐두고 하던 때, 방송작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던 때 정도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20대 초중반 ‘열심’이던 그때를 지나 마흔이 넘어 다시 ‘열심’을 기울인 일이 바로 임신이다. 누가 하라고 하면 못 했을 일이다. 겁 많은 내가 내 몸에 주사를 놓아가며, 어지럽고 흔들리는 속을 부여잡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을 움켜쥐고, 여러 번 마취를 하고 통증을 참고, 기약 없고 장담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계속 뭔가를 해나가는 것. 마흔이 넘어 내가 접한 최선의 ‘열심’이었다. 그 ‘열심’은 나를 외면하지 않고 원하던 결과를 안겨줬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고 높지만 일단은 오늘의 결과에 안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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