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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Dec 02. 2021

떠나온 골목의 순간들  

퇴사 후 삶을 씁니다. (아홉 번째 이야기)

이사를 했다. 창이 더 커지고, 풍경은 더 높아졌다. 작은 마루와 방을 살뜰하게 채웠던 가구와 소품들은 너른 공간에 여유롭게 들어찼다. 아침마다 혹은 해가 드나드는 모습이 다를 때마다 창밖을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지만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이전 집과 많이 달랐다. 작은 창이 여러 개 나 있던 골목 중간의 우리 집은 건물과 길을 비추는 아기자기한 풍경이었다.


새롭게 만난 우리 집은 멀리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너른 도로가 보인다. 도로 양 옆으로는 높고 낮은 누군가의 수많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들이 없어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제법 잘 보이는 괜찮은 뷰를 갖게 됐다. 너른 창을 마주한 작은 창으로는 아파트 불빛이 반짝이는 야경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비가 내리는 차분한 풍경도 마주할 수 있다.     

 

제법 좋은 풍경을 가진 새로운 집이 마음에 들다가도 마음 한편엔 골목에 있던 작은 우리 집이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가 들리던 낮은 집, 작은 창으로 비춰 들어오던 저녁노을, 타닥타닥 비가 내리던 소리가 잘 들리던 작은 마루, 해가 드나드는 모습이 단정하게 남아있던 옆집의 붉은 벽, 골목을 비추던 한밤의 가로등까지. 4년 여 간 매일 보고 듣던 작은 집의 풍경과 소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꽤 자주 찾아온다. 이무래도 나는 그 풍경과 제법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그 집에서 그 풍경을 마주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골목의 소리들을 듣지 못하니 몹시 허전하고 아쉽다.

      

익숙해지면 떠나기 싫은 건 누구나 다 같은 마음일까. 나는 유독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일, 낡고 친밀한 것들을 떼어놓는 일이 어렵다. 처음엔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그 동네가 헷갈리고 어려웠다. 내 집 하나 찾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골목골목 오래된 밥집과 개성 있는 커피집을 발견하고 어디로든 통하고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이 익숙해지자,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공간이 됐다. 밤이면 남편과 손을 잡고 짧은 산책을 했고, 친구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골목을 안내하며 내가 좋아하는 밥집과 커피집을 찾곤 했다. 작은 골목 끝 동네의 가장 큰 번화가에 있는 마트에서 채소와 고기를 사고, 무뚝뚝한 사장님네 과일가게에서 사과와 참외를 골라 들었고, 다정한 꽃집 언니에게 봄꽃을 추천받아 기분 좋게 들고 오기도 했으며, 늘 사람들로 붐비던 밥집에서 남편과 저녁을 먹던 일상적인 기억들. 지금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골목의 순간들이다.

     

다시 그 골목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마음은 아닐 것이다. 잠시 산책하듯 다녀가는 것과 그곳에 내 공간이 있고 생활이 있고 삶이 있는 건 분명 다를 테니까. 아마도 천천히 멀어지고, 옅어질 것 같다. 골목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그리움이 말이다.


이제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풍경이 어느 순간 익숙한 것들이 되어가는 순간이 오겠지. 이곳에서도 나는 좋아하는 분위기의 커피집을 발견하고, 걷기 편한 산책코스를 찾아낼 것이고, 마음이 느긋해지는 풍경을 순간순간 마주할 것이다. 아직은 낯설고 새롭기만 한 이곳도 언젠가는 익숙한 내 일상이 되어 내 마음에 스며들 것이다. 다만 그 순간이 조금 빨리 찾아오길 바란다. 그래야 내가 사랑했던 그 골목이 덜 그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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