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번 이상 울 줄 아는 것이다

눈물의 힘을 믿어요

by 반달

태어나서 사람은 세 번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던가.

태어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글쎄...

요즘 이 삼 세 번의 의미가 먹히는 시대인가 싶지만,

예전이라면 왜 이렇게 이야기했는지 알 법은 하다.

눈물이 사치라 했던가.

헤프게 우는 눈물의 의미는 값싼 보석만도 못하므로,

그 눈물을 잘 삼키고

정말 필요할 때 만 울어야 한다는 것.

눈물이 신파극의 산물이 되면 안 된다는 의미이겠지.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이제는 감동도 감흥도 무뎌진다.

겪을 만큼 겪었고, 슬플 만큼 슬퍼서일까,

아니면 이런저런 못 볼 꼴도 봐가면서

이제는 도파민 터질 것은 누구네 이혼 이야기 정도 일려나.


얼마 전 TV 재방송에서

도경환, 장윤정의 아들이

자신이 사춘기를 겪으면 어머니가 갱년기 시기이고,

어머니의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길 강적이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감정의 폭이 풋풋하고 혈기 왕성한 사춘기를 이긴다니,

또 그런 면에서 어른의 마음이란

더 경험의 세월만큼 다이내믹해지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어른이 될수록 감정표현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남자건 여자건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행여 내 눈물이 자식의 마음을 흔들까

노심초사하고 꾹꾹 눌러 담으면

결국 화병 밖에 올 건 없지 않은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이라고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일종의 기준을 보면

최신 개정판에는 없지만 과거(DSM-4)에는 문화 관련 증후군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특별히 발견되는 질환처럼 '화병'이 정의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음을 잘 표현하거나 드러내는데

'한(恨)'서린 마음일지니.

마치 소복 입은 귀신들이 한을 풀어주면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왠지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일상이었으리라.


근데 지금은 현대사회고

과학이 발달했고

물론 위의 상황들도 심각하고 필요하다면 의학적 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손쉬운 방법은

'울고 싶을 때는 울어버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눈물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아이들도 울고 나면 무언가 진정이 된다.

어른이라고 별다를 것도 없다.

실컷 울어재끼고 나면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말랑해진다.

'울고 싶을 때는 우세요. 부끄러운 것 아니에요.'

상담할 때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짜 효과가 있으니까.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신생아는 아닐 테니

어른의 울음이란 자고로

오랜 마음이 켜켜이 누적되어

꾹꾹 눌러 마음 담은 연필로 쓴 편지와 같아

한 줄 읽으면 눈물이 뚝뚝 흘러

마지막 줄을 읽을 때는

꺼이꺼이 울며

결국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이다.


간혹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창 밖 한강을 보며

눈물을 훔치거나

저녁 시간 버스에 앉아 창밖에 기대어

눈물을 흘린다면

마음속으로

그래 집에 가서 펑펑 울어버리고

그리고 내일은 다시 웃으며 일어나자

그렇게 다독이길.


울음은 치유의 바다가 되어

마음속 차오른 그릇을 비워주고

다시 무에서 시작할 용기를 줄 것이다.



화면 캡처 2025-09-13 183948.jpg 《영원의 문》. 종이에 연필과 수채화. 1882년 작품.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 출처: 위키백과





이전 13화...기다리는 빛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