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아름다운 건 너였고 우린 그걸 잊고 살았을 뿐이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꽃을 좋아하나 싶다.
카톡 프사에 꽃을 해놓지 않으면 중년이라 말하기 어려운 규칙이 있나?
30대 초까지만 해도 엄마의 카톡 프사 속
계절마다 메인을 장식하는
그 꽃들의 아름다움은 관심 밖이었다.
왜 매번 봄이면 진달래 꽃놀이, 가을이면 코스모스 꽃놀이를 가는가.
이 또한 이해되지 않았다.
지천에 널린 게 풀떼기이고, 집 안 베란다를 꽃이 차지한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인데
그게 왜 또 굳이 나가서 까지 보고자 기를 쓰는가는
내가 40이 넘어서야 자연스레
아.... 하는 감탄과 함께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주로 따지면
먼지 만도 못하게 작디작은 존재라 했던가.
그거보다 큰 먼지만 한 지구에서
그중 여기서 이렇게 복작거리며 아웅다웅 사는 것이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인생의 중대한 목표이기도 하다.
나 또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먼지 만도 못한 존재들 사이에서
그래도 존재감 하나 가지자는 일념 속에
부단히 노력해 왔고 주변을 의식하며 살았다.
마치 더 아름답게 피어났다고
향기로, 외모로, 크기로 뽐내는 꽃과 같이 말이다.
학생 때라고
시험이라는 평가 속에서 경쟁이 없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른의 경쟁은 뭐랄까...
순위를 매길 수 없는데 순위가 갈리는
단순한 직급의 차이를 넘어
삶의 레벨이 달라지는 차원이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어나더 레벨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포기하고
자존심 긁히며 이를 극복하려 또 마음을 긁으며 살아간다.
우울, 불안, 뜻 모를 공포 속에서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세상에 무한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주 어렵지 않게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저 평범한 주변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런 극단적 생각을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자살 국가사업이 소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는 건
매년 예산을 투자하고 지원해도
자살에 대한 수치는 좀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입버릇과는 차원이 다른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슬프게도 '버텨내지 못하겠다는 것'에 있기도 하다.
결국 삶은 버텨내는 것인데
그게 나에게 이유가 있던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던
삶의 바짓가랑이를 놓아버리는 데에는
이제 버틸 원동력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이겠지.
그럴 때 일 수록 사소한 행복에 눈을 돌렸으면 한다.
오늘 햇살이 맑은 것,
아침에 지하철이 딱 시간 맞춰 온 것,
길에서 우연히 100원을 주은 것,
지나가던 강아지가 나에게 좋다고 꼬리 친 것 등
우리는 무수히 피식 웃음 짓는 일들을
하루에도 수백 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될수록 이제 웬만한 도파민은 나를 자극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오히려 무던한 잔잔함이 심금을 흔들 때가 있다.
우연히 길을 걷다 가로수 밑 뿌리 부분 옆에
기어이 뿌리를 내리고 핀 민들레 꽃에 시선이 갔다면,
나는 이미 오늘을 잘 버티고 살아낸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