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빌려서 옥문관, 아단지질공원에 가자
이 글은 2019년에 다녀온 경험으로 쓴 글입니다.
3일 차 투어는 막고 굴을 제외한 조금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돌아보는 투어를 하였다. 택시를 전세 내서 돌아다니기로 하였다. 아저씨가 800위안을 불렀는데 옥문관은 둔황에서 100킬로 정도 아단지질 공원은 옥문관에서 70km를 더 가고 양관은 또 이 유적들과는 반대라서 너무 멀어서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흥정을 하면 650도 가능할 것 같은데 나나 동행이나 그런 주변머리가 없어 아저씨가 가격을 부르자마자 오케이 해버리고 말았다.
발 캡처 발 구도의 사진이 다수 나옵니다. ㅠㅠ
일정은 먼저 남쪽에 있는 둔황 고성과 양관을 들러 점심을 먹고 서북쪽에 있는 옥문관 과 주변 유적 마지막에 아단 공원을 돌기로 했다.
일정을 짤 때 유의할 점은 아단 공원이 매우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단 지질 공원은 둔황에서 거의 170km 떨어져 있는데 차로 두 시간 넘게 걸린다. 인간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광활한 사막에 기이한 바위덩이들이 놓여있는 신비한 곳이지만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는 개인의 판단이다. 아단지형에서 밤에 뜨는 별을 보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다른 블로그에서 보았지만 아단 지형은 6시 입장이 마지막입장이고 9월은 6시에는 아직 해가 뜨지 않으니 별을 볼 수도 없다. 별을 보려면 저녁때쯤 택시를 잡아서 한 150위안쯤 주고 양관에 가자고 하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지쳐서 시도하지는 않았다.
느지막이 돌고 싶어서 10시에 출발하자고 하여 다 돌고 돌아오니 8시쯤 되었다. 기나긴 투어였다. 코스가 힘들어서기 보다 차 안에 타서 이동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둘로 나누어도 될 것 같다. 천불애나 사천불동은 일정에서 빼버렸다.
아침에 차를 타니 아저씨는 일단 주유를 하며 장거리 운행 대비를 한다. 둔황 시내를 벗어나 30-40분쯤 가니 둔황고성에 도착했다. 3일째가 되니 비몽 사몽하여 여기가 진짜 고성을 개조한 세트장인지 그냥 허허벌판에 지은 세트장인지 확인할 여력이 없다. 둘 중 무엇이 됏든 멋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성문입구 둔황이라고 쓰여있다.
드라마 영화 장비들이 많다. 현재도 무엇인가 촬영 중이다
어딘가 익숙한 세트장 관광객 할아버지가 황제 의상을 입고 있다.
세트장이 익숙하다 했더니 영화 '놈놈놈'을 촬영 한 곳이다.
지형이 어디서 많이 본 지형이다 했다..
영화상 설정은 만주인데 찍은 곳은 서북이라니 재미있다. 입장료가 인달 70위안인가 그랬다. 역시 여기도 낙타랑 사막 바이크 의상 대여 서비스가 있다.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하니 여기서 콘셉트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올 것 같다.
(여기서 사막 바이크나 낙타를 세트장에서 타는 호구는 없겠지요?)
세트장을 떠나 또 한 30분쯤 가니 이제 양관 유적지에 도착했다. 또 120 위안인가를 내라고 하여 입장료만 얼마를 쓰는지... 양관은 한나라 이래로 실크로드의 남쪽 관문이었다. 수도 장안을 떠나 북쪽 란저우를 거쳐 둔황에서 두 가지 길로 갈라진다. 타림분지 남쪽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양관을 지나야 하고 타림분지 북쪽을 지나기 위해선 옥문관을 나서야 한다. 과거에는 양관이든 옥문관을 나서면 이제 더 이상 중국이 아닌 돌아올지 아닐지 기약 없는 길이 되는 것이다. 먼저 타림분지 남쪽으로 나가는 관문인 양관에 도착한다.
입구부터 매우 거대한 현대식 건물을 세워 뒀다.... 요즘 중국에서 하는 일이 입장료를 받아서 이렇게 화려한 재현 물들을 세우는데 정말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과거의 유적을 보러 온 것이지 테마파크 민속촌을 온 것이 아니다... 줴발...) 의미 없이 거대하고 화려한 입구와 박물관을 지나니 옛날 유적이 나온다.
이런 게 유적이지... 제발 세트장 덧칠은 그만했으면 한다.
맑은 하늘과 구름 사막과 옛날 성의 유적은 감상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물론 성안에 군사들 함성과 북소리 스피커를 켜둔 것은 정말 최악이었다.
아마도 왕유의 동상인 듯
이렇게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두었다. 왕유는 약관을 떠나는 친구에게 "勸君更進一杯酒/西出陽關無故人"라는 시를 남겼다. "그대에게 술잔을 다시 한잔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아는 사람 하나 없지 않나!"라고 읊었다. 양관의 모습도 왕유의 시도 저런 거대한 동상과 안 어울리는 시정이다. 게다가 친구가 서쪽을 떠나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기약이 없이 말없이 잔을 권하는 서정적인 사람을 관의 바깥에서 무슨 성을 공격하는 호탕한 장군처럼 만들어뒀다. (제발... 적당히 좀... 위치라도 관 안에 두던지.. 하던가 무슨 동네 아저씨가 이 술이 식기 전에 관을 함락시키겠소 하는 자세다. 동네 아재들이 술 마시면서 보기엔 딱 좋겠다.)
역시나 여기도 낙타 투어 당나귀 투어 승마 투어가 있다. 낙타 투어 50위안 말투어 40위안 당나귀 투어 30위안이었다. 낙타를 타기로 한다. 사람도 없고 날씨도 좋아 한 바퀴 돌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낙타를 타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제법 실크로드에 온 기분이 났다.
저 멀리 돌아오는 당나귀차 햇볕이 강해서 당나귀 차가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낙타를 내려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봉화대 쪽으로 갔다. 언덕을 넘어 반대편을 보자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빨간 언덕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 사막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설산! 입을 떡 벌리고 탄성을 질러대며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다보았다. 압도된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절절히 느꼈다. 북쪽 사막을 일컫는 북막 北漠의 막자를 왜 아득할 막 외로울 막을 썼는지 몸으로 체험하였다. (내 발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된다. ㅠㅠ)
설산 너머에서 달려오는 유목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세워졌을 봉화대에서 장안에서부터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타향에서 징집되어 국경을 수비할 병사들과 저 멀리 아스아리 보이는 설산을 넘어야 하는 사신, 구도자, 상인들이 느낄 아득함, 막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양관에서 바라본 사막의 풍경은 둔황여행에서 가장 큰 기억에 남는 풍경이었다. 물론 같이 간 동행은 둔황을 넘어 투르판 우루무치로 가서 더 많은 풍경을 봤다고 하지만 이날 우리 눈앞에 펼쳐진 아득하고 장엄한 풍경은 여행 내내 또 한국에 돌아와서도 잊히지 않았다.
- 근처 농가에서 현지 가정식을 먹는다.
양관을 나와 근처 포도 농장에서 농가식 점심을 먹었다. 다음 코스인 옥문관 까지는 1시간 정도 거리이기 때문에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양관을 떠나 옥문관으로 향한다. 옥문관은 양관과 더불어 둔황의 2대 관문이다. 그런데 이 관들의 이름이 이상하다. 陽(볕양) 관과 玉門옥문(옥으로 만든 문 또는 음문이라는 뜻이다.)이라니 남쪽의 양의 기운의 이름을 가진 관과 북쪽의 음의 이름을 가진 관이라니 발상이 특이하다. 중국사람들의 세계 관에는 둔황 서쪽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너머 곤륜산이 있고 이 곤륜산은 모든 풍수에서 말하는 기맥의 근본이 되는 강한 음의 땅이며 서왕모가 다스리는 죽음의 땅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거대한 음의 기운의 땅을 막고 있는 옥문관
하지만 이름의 유래를 찾아봤더니 여러 가지 설화가 있다. 옥문관은 원래 소반방성이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던 상인들이 길을 자주 잃어 말도 길을 잃는다 하여 마미도라고 불렸다고 한다. 전설에는 어떤 상인들이 길을 잃었을 때 우연히 구해준 기러기가 말을 하며 알려주길 길을 가며 옥을 박아 두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옥을 여기저기 박아 두면면서 길을 찾아갔는데 슬몃 욕심이 들어 돌아오는 길에는 옥을 박지 않아 다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때에 구해준 기러기가 다시 날아와 아예 성문 위에 옥을 박으라고 알려주 하여 반방성 꼭대기에 녹색 야광주를 박았고 그때부터 상인들은 길을 잃지 않게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실크로드가 개발되기 전 서역 무역은 모두 옥을 수입하기 위한 길이였고 특히 옥문관은 서역의 옥을 수입해 오는 길이였다. 서역에서 귀한 옥을 수입해 오는데 이상하게도 낙타들이 이 관을 나서기만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물어보자 어떤 노인이 말하길 관을 다스리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시 않아서 신이 노하였기 때문이오 관위에 좋은 옥을 하나 골라서 박는다면 신이 노여움을 풀 것이오라고 했고 과연 옥을 골라 바치니 낙타들이 기운을 차리고 옥을 날랐다는 전설이다.
많은 전설에서도 말하듯이 옥문관에는 큰 옥이 박혀 있어서 옥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큰 음기를 막기 위해 옥문이라고 지었을지도 모른다 이천 년도 넘은 지명이 아닌가?
어쨌든 지금의 옥문관이 발굴되기 전 옥문관은 3차례나 그 위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전한 때는 지금의 이 서쪽에 자리를 잡았지만 토번이 이곳을 점령하자 200킬로를 후퇴하여 다시 옥문관을 만들었고 그 뒤 송나라 때 이르러 버려져 이렇게 폐허가 되었아도 한다. 200킬로를 후퇴하여 다시 옥문이라는 이름을 고집한 것으로 보아 옥과 관련된 설화보다는 음기을 음기로 막으려 했다는 내 가설이 맞는 게 아닌가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옥문관의 황량한 모습
마지막 코스 아단지질공원: 광활한 사막에 끝없이 펼쳐진 기암괴석들
역시 사진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면 다 같이 버스를 타고 다시 떠난다. 입장료가 또 있지만 갈만한 가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