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역시 그렇게 자전거를 수리해 가며 정말 신체 건전하고 친환경적으로 유흥의 지도를 그려 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짐작하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이러한 퇴폐한 모습의 이면에는 순수한 사랑의 모습도 있었다. 무엇인가가 퇴폐하려면 우선 퇴폐 이전의 순수함이 필요한 법이다.
J의 아버지가 J를 중국에 보내면서 그를 중국에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투다X라는 꼬치구이 집 사장의 친구에게 보내서 사업을 도우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MSN메신저 너머로 전해 들은 J가 알려준 한국에 들어온 일본식 이자까야의 변형인 투다X를 중국에 수출하는 일은 정말이지 포스트 모던하고 글로벌한 일인 것처럼 들렸지만 막상 나중에 중국에서 가보니 그냥 체인점 알바였다.
순수한 사랑이 낡아서 폐해지기 전 J 역시 순수하고 바른 사랑을 했다. J는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생전 처음 들어보고 지금도 기억을 못 하는 중국의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온 '소형'(이라고 그가 부르는 것만 기억된다. 난 그 당시 말을 못 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조자 제대로 못 불렀다.)과의 사랑의 아픔에 고민하고 있었다.
J는 살아 있다는 증거를 느끼고 싶어 했다. 그 시절 우리를 충격에 빠트렸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나 영화'매트릭스'처럼 이 세계가 한낱 꿈일 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 삶이 그저 허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너의 삶은 그냥 꿈이었다"라는 말을 건네어 올 까봐 두려운 것처럼 J는 매일매일 삶을 느끼고 증거를 찾고 싶어 했다. 그리고 모든 감각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삶의 증거를 새기기 위해, 삶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J는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른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그의 인생이 실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J의 인생에 나타난 모든 여자들을 사랑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 사랑의 현장에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그의 사랑에 감정은 언제나 새로웠으며 이전 사랑의 결과가 어떻듯 한번 도 사랑에 실패해 보지 않은 것처럼 새로 다가온 사랑에 주저함이 없었다.
아무리 짧더라도, 어제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오늘 다시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오더라도 J는 매번 모든 사랑의 감정에 진실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 느껴지는 감정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숨기거나 떠오른 자신의 감정의 깊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J가 처음 사랑을 시작한 중국에 진출한 일본식 이자까야의 한국식 변형의 가게는 나와 J가 다니던 상하이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대학교의 주변에 있었다. 지하철도 닿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나름 한인타운이 작게 형성될 정도였다. 유서 깊은 상하이의 홍코우 공원 근처의 일본인 지역과 그 바로 옆 구베이에 붙어있던 기존의 한인타운이 있었지만 한중 수교와 IMF의 대량 실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많은 한인들이 기존의 한인 타운의 경쟁을 피해 비교적 새로운 우리의 학교가 있는 이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J가 다니던 대학교가 있던 오각장 지역은 많은 대학교들이 붙어 있던 캠퍼스 타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많이 살았고 유학길을 떠나온 유학생들과 까다로운 취업비자보다는 쉬운 학생비자로 사업을 시작한 학생을 빙자한 사장님들 등 여러 종류의 한인들이 새로운 기회의 땅에 정착과 재기의 열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J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운영하는 일본식 이자까야의 한국식 체인점인 투다O의 중국 지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가끔 가게를 봐주기도 하며 용돈도 벌고 중국어 실력도 늘리고 있었다. 중국은 아르바이트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노동자는 정규직 직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정규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제일 속물 자본주의가 팽배한 사회주의 국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하지만 지역별로 임금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는데 당시 상해의 평균 임금은 한국 돈으로 한 달에 3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지금은 아주 우스운 돈이 되었지만 그 당시의 환율과 중국의 물가로는 한 달을 충분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학생인 우리들의 용돈도 얼추 그 정도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노동자 한 달 월급을 용돈으로 받는 한국의 학생들은 한국과는 다른 생활 수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지방의 상황은 더 열악했는데 그래서 직장을 찾기 위해 농촌에서 엄청난 숫자의 농민 출신이지만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농민공’들이 상해로 밀려들었고 대도시로 가는 노선이 있던 상해역이 아닌 작은 도시와 연결을 하는 상해남역 앞 광장에는 이렇게 올라온 농민들과 또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농민들이 광장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하느라 항상 북적거렸다.
소형이 도 그런 농민공의 하나였다. 상해 근교 어딘가의 농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역광장을 떠나 무려 외국인이 운영하는 일본식 이자까야의 한국버전의 중국 수출점에서 일하는 직원이 되었다. 중국에 오기 전 J와 내가 버디버디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때부터 J는 그녀에 대해 그리고 농민공에 대해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그녀가 어떻게 상해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하는지 얼마나 촌스러운지를 나에게 J는 낱낱이 전해주었고 나는 이제 막 문을 연 중국 대륙의 여성들은 내가 보던 대만과 홍콩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세련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촌스러움과 세련되지 않은 외모에 대해 적잖게 혹평을 하던 J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흔하디 흔한 동네 불량배들 덕분이었다. 중국은 공권력이 강한 편이라 조직폭력배들은 조직 결성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는 강한 법으로 인해 거의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모든 왕조는 작은 폭력 조직 또는 종교 조직이 이전 왕조를 뒤집는 기초를 다졌기 때문에 범죄단체 조직은 매우 강한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변두리에는 여전히 불량배들이 동네 상점에게 보호비를 받고 있었다. 외국인 상점은 말이 통하지 않아 건드리지 않고 있었지만 일본식 이자까야의 한국식 해석을 거친 술집의 중국지점에 한국에서 유학 온 대학생들과 새로운 것들을 좋아하는 중국 손님들이 제법 드나들게 되자 더 이상 보호비를 안 받고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불량배들은 소형이 가 일하는 타임에 종종 들러 가게 손님들이 술 마시는 것을 방해하고 그저 소형이에게 지저분한 농담이나 던지는 정도로 일본에서 수입되어 한국에서 변형되고 중국까지 진출한 가게의 실력을 가늠해 보며 혹시 자신들도 모르는 한국의 '빽'이나 중국의 '꽌시' 일본의 '기마이'든 뭐든 있나 없나 두드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