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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Mar 12. 2023

J의 세 번째 사랑 (1)

그 뒤 J는 나랑 놀자고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희정 누나와의 작전이 실패해 버렸기 때문이었지만 J가 자존심 때문에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나 역시 그즈음은 깨져버린 사랑의 아픔에 오열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친구의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술은 매일 많이 마셨고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우린 말하지 않아도 란저우 라면 집에서 만나기로 돼있었다.


지금은 대만의 우육면이 유명해졌지만 내가 상해에 있을 때에는 그리고 아직도 대륙에는 란저우 라면이 대세이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모든 동네에는 신장에서 온 회족들이 운영하는 란저우라면 집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중국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일까? 회족(무슬림) 주방장들은 면을 손으로 반죽해서 길게 뽑아 국수를 만드는 주방을 오픈해 놓고 보여주었다.


열악한 식당 위생으로 악명 높던 중국에서 주방의 모습을 홀에서 하나하나 보면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는 란저우 라면 집은 나름 중국에서 인정받는 깨끗한 음식점으로 명성을 얻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문명의 태동기에 종교가 사람들의 양심을 최초로 비추어 주었다는 것을 나는 중국에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저 이윤을 제공하는 타 부족의 사람으로 대해질 때의 결과를 나의 위와 대장으로 느꼈고 고통의 크기만큼 나의 위와 대장은 종교의 계율들이 우리 사회에 주는 신성함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주로 란저우라면이라는 간판을 걸었거나 서북음식점이라는 비슷한 간판을 걸어 두고 홀에 들어가면 이슬람 경전이 한 줄 정도 걸려있고 메뉴는 어느 집이던 똑같았다. 주로 우육라면, 도삭면, 볶음면, 볶음도삭면, 서북닭요리, 서북 볶음밥, 고기버거를 기본 메뉴로 갖추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젊은 막내 또는 아들이 주방에서 면을 치고 있고 맏형이나 아버지가 서빙을 보았다. 안쪽 국물을 내거나 재료를 다듬는 곳은 어머니나 맏형의 부인이 들어가 있어서 음식을 가져다줄 때만 부르카인지, 히잡인지 항상 모르겠는 머릿수건을 두른 채 고개를 내밀고 홀 안에 손님이 누가 있나 두리번거렸다.


소수민족은 중국의 산아제한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중국 어디를 가던 어눌한 말투나 옷차림으로 외국인이라고 주목을 받던 나는 우육면 집에서는 손님과 주인이 둘 다 외지인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 않고 고요하고 안전한 한 끼 나의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자주 모이던 학교 앞의 간판도 안 걸어 둔 맑은 쇠고기 국물의 란저우라면집은 항상 아마도 19-20세쯤 되는 청년 둘이서 돌아가며 면을 쳤다. 미리 만들어 둔 두꺼운 밀가루 덩어리에서 1인분 또는 2인분만큼의 작은 덩어리를 떼어내어 찰기를 주기 위해 조리대에 탕탕 치대 가면서 손으로만 면을 뽑아내는 광경은 돈 없던 우리 학생들에겐 단돈 250원을 주고 요리 쇼까지 볼 수 있는 저렴한 사치였다.


라면집은 점심때면 한 끼 든든히 채우려는 학생들로 가득 찼는데 음식 맛에도 나라별 취향이 있는지 우리가 가는 식당은 주로 한국인 일본인 학생들만 찾아오고 중국 학생들은 오지 않는 현지 외국인들의 맛집이었다. 신장말로 노래를 부르며 밀가루 반죽을 탕탕 쳐 대며 면을 뽑는 아이도 아마 우리 또래 일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서역의 피가 섞여서 콧대가 높고 이목구비가 동양인과 서양인의 중간인 얼굴이었는데 제법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유학 와서 형형 색색에 오토바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점심을 먹는 학생들과 가난과 정부의 박해를 피해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이라고는 면을 뽑는 직업뿐인 우리 또래의 면을 뽑는 청년의 모습은 뭔가 미묘하게 대비되었지만 장사 중간중간 짬을 내어 형제 조카들과 장난을 치는 그의 모습은 참 해맑아 보였다.


그 청년이 어느 날 돈 많은 유학생의 상징인 형광색의 스쿠터를 몰고 다니길래 우육면 장사가 그렇게 잘되는가 싶어 의아했다. 전말을 들어보니 나 말고도 그 청년을 눈여겨보던 외국인들이 많았는지 어떤 일본인 여학생이 그에게 구애를 하면서 스쿠터를 한 대 사주었다고 했다. 그 당시 일본 여학생은 J와 나에게는 동영상으로만 접하던 성애의 판타지의 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두고 분개하며 한국식 수제비 집이라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분개하였다.


 그 당시 나는 사랑의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국에 두고 온 나의 여자친구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다가 결국 나에게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많이 원망하고 있는 디즈니와 여러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자라온 나는 간절한 마음은 상대에게 닿는다. 운명적인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라는 생각을 믿고 있었다. 사랑 경험이 전무하던 나는 실제 사랑을 하기 전에 디즈니 만화, 만화책, 영화, 드라마를 통해 사랑을 배웠고 극 중에 등장한 주인공과 가장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서로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사랑의 힘은 우주를 구할 정도로 고결하고 위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물론 한 번도 도전받은 적이 없고 반대되는 의견을 받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마치 교과서의 법칙들을 외우듯 나에겐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에 오기 전 새내기 대학생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E여대 새내기에게 첫눈에 반한 나는 지금은 매워서 없어진 E여대 정문을 지나 아래로 지하철이 다니는 다리에서 장미 100송이를 바치며 구애를 했고 여러 학교에 예쁘기로 이름 높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기에 성공했다. 이런 과감한 행동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마치 전기를 맞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당연히 내 인생의 여주인공이라는 디즈니식 연애 공부의 덕이 컸다. 물론 덕이 큰 만큼 폐해. 도 컸다. 디즈니에는 고백과 키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뿐 그 뒤의 연애의 실전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내가 디즈니와 로맨틱 코미디 보다 다른 장르를 더 선호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고백 이후에는 표현 방법을 몰랐고 친구들과 놀기, 게임, 만화책 보기 등등도 동시에 사랑했던 것 같다. 장미 100송이의 효과가 사라질 100일 즈음해서 이미 1차 이별 통보를 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울부짖는 다소, 어쩌면 많이 감정적인 일방통행을 하는 나에 그녀는 적잖게 당황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어… 그냥… 한 번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냐?”


“그게… 아니라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 하고.. 내가…. 진짜.. 잘할…”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오열하는 나를 그녀는 다시 받아 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곧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지만 당시의 나는 알 도리가 없었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 내 인생의 여주인공을 끌어안으며 영화의 고비처럼 잠시 흔들렸던 우리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가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별통보를 했다. 친절하게도 중국으로 떠날 때까지 기다려 줬던 것이다. 나는 완전 무너져 내렸고 세상과 나의 진심를 알아 주지 않는 여자를 탓하였다. 나의 이런 생각에 공감한 훈이형과 J는 우리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복수라는 미명으로 또 J의 끝나 버린 사랑을 대체하기 위한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밤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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