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이도 그런 기간 중에 알게 된 친구 중에 하나였다. 중국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저녁이 되면 일찍 집에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대다수였다. 물론 지금도 한국인들은 온 저녁을 밝히며 술을 마시지만 그때의 상해는 시내 중심의 외국인 구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9시만 되면 불이 꺼지고 거리에 사람은 무엇인가에 결핍이 되어있는 J와 나 그리고 훈이형 뿐이었다. 훈이 형과 나, 나와 J가 둘만 술을 마시게 되면 둘은 또 어색했기 때문에 곧잘 정윤이를 불러 냈다.
정윤이라는 친구는 나의 어학원 수업 중 본과 학생들과 같이 듣는 교양수업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였다. 어학원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수업에 듣던 나는 한국인 같아 보이던 정윤이에게 말을 걸어 도움을 청했고 어떻게 하다 보니 그녀가 나와 동갑이며 내 한국 학교와 현재 중국 학교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타지에서 만난 동갑내기 동문에게 금방 마음을 열었다. 나는 내성적인 그녀가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째서인지 그녀는 나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낀 자리에는 곧잘 따라 나왔다.
훈이형과 J는 내가 정윤이를 알게 된 것을 두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고 역시나 공략해서 사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남자라면 당연한 것처럼 동의했다. 며칠이나 작전회의를 하고 또 만날 때마다 작전을 짰다. 그리고 J와 훈이형은 내가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통 크게 나의 몫으로 그녀를 양보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만난 뒤에 나와 친해진 것이 내가 무슨 남성적인 마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성같이 편안한 느낌을 줘서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과 자존심의 상처를 대가로 지불했다.
하지만 아직 작전을 포기하기 전 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양꼬치 패밀리를 만들어서 그녀와 친해지기로 작전을 짰다. 그때만 해도 환율이 120:1이었으니 양꼬치 하나에 1위안이면 120원이었다. 지금은 양꼬치 하나에 10위안에 환율이 140-160을 오고 가고 200을 돌파했다는 끔찍한 소문도 들었으니 20년 새에 양꼬치 한 개의 가격이 우리 돈 120원에서 2000원까지 수직 상승해 버린 셈이다. 그런 시절에 중국을 겪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그때는 저렴했던 양꼬치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였다.
저녁이 어스름 해지면 길거리 곳곳에서 양꼬치 가판들이 나타났다. 주로 드럼통을 반으로 쪼갠 화로나 투박한 철로 사각 화로를 만들고 아이스 박스에 각종 꼬치를 담아두고 화로의 한쪽에는 숯불을 태우고 있다가 손님이 와서 주문을 하면 숯을 잘게 쪼개어 부채질을 하고 불을 다시 키워서 양꼬치를 구워 주었다. 많은 꼬치 장사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위구르 아저씨가 파는 꼬치 가판대를 즐겨 이용했다. 아저씨는 자기가 신장에서 온 위구르 사람이라고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신장이 어디 인지는 몰랐지만 위구르 족은 게임을 하면서 예전에 서하를 만들었던 중국의 소수 민족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신장은 중국의 서북쪽이었고 사막과 무슬림들의 고향이었다. 신장에서 온 아저씨는 자기 고향에서 많이 키우던 양을 유통해 와 양꼬치를 파는 것을 업으로 삼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우리가 외국인인 걸 알자 신기해하며 금방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면서 아는 척을 해주었다. 아저씨는 우리가 좋아하는 부위가 떨어질 때쯤 되면 다른 손님이 그 부위를 시켜도 떨어졌다고 말하고 안 내어 주다가 우리가 오면 우리에겐 내주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자기는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술을 팔진 않았지만 우리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와서 아저씨의 양꼬치를 사서 먹는 것은 눈감아 주었다.
J의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다가 또 한 장에 5위안이던 불법 복제 디비디를 보고 또 보고 온갖 상상에서 동원된 유치한 궁리를 하다가 배가 고파지는 10시쯤이 되면 우리는 별다른 할 일도 없이 양꼬치 가판대로 갔다. 양고기 꼬치를 시키고 그날 그날 입맛에 따라 양 힘줄, 닭날개, 닭염통, 양신장, 양 갈비 등 그때그때 이름도 제대로 못 읽는 부위를 시키면 아저씨가 아이스 박스에서 각얼음 사이에 얼어 있는 꼬치를 꺼내어 주었다. 소고기도 있었고 ‘청화어’라고 불리는 꽁치를 닮은 물고기도 있었다. 야채도 배추부터 부추까지 갖은 재료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기다란 빗물받이 통처럼 생긴 철 화로 임시 오븐의 한쪽 끝에 작은 불씨들을 태우고 있다가 우리가 주문을 하면 반대쪽 끝에 쌓여 있는 숯을 우리 꼬치를 구울 만큼 잘라내고 나뭇잎 부채를 부치며 화력을 더해가며 빨갛게 익은 숯 위에 꼬치를 구워 주었다. 고기로 된 꼬치를 먼저 굽고 부추나 버섯 배추 같이 금방 익는 야채는 고기를 굽다가 중간쯤 숯 위에 올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향신료를 뿌려주며 우리에게 향신료를 얼마나 뿌려 줄지 물어보기도 하였고 나중엔 우리가 어느 정도 향신료를 뿌리는지 기억해 두었다가 아예 묻지도 않고 뿌려 주었다.
아저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잿빛 연기를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더했고 길바닥은 선선한 저녁 공기 냄새, 낮의 매연 냄새, 흙먼지 냄새에 꼬치구이 냄새가 덧붙여져 제법 운치를 자아냈다. 상해 어디를 가든지 주택가 사이로 흐르는 강남의 운하들의 녹색 물에서 나는 냄새도 저녁 바람에 실려왔다. 지금은 양꼬치 집들이 모두 고급화되어 실내로 들어갔다. 하지만 예전의 향신료와 함께 아저씨의 나뭇잎 부채와 알 수 없는 노랫말까지 양념으로 배인 양꼬치를 이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골목엔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 차고 동네 주민들은 잠옷차림에 집에 있다가, 퇴근을 하다가, 공부를 하다가 그 냄새를 맡고 하나 둘 나와서 목욕탕 의자 같은 것들을 깔고 앉아 양꼬치를 먹기도 하고 더러는 맥주를 마셨다. 동네 청년들도 하나 둘 나오고 때로는 저녁잠이 없는 노인들이 나와서 마작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해 사람들은 남방지역 사람들 답게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두워진 정통부의 거리에서 잿빛 고기 연기를 내뿜으며 주황색 전구 몇 개를 켜고 숯불에 부채를 부치며 위구르 아저씨가 부르는 자기 고향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젊음의 결핍을 맥주와 양꼬치로 채워 보려 했다.
기숙사에 통금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양꼬치를 향해 밤마다 탈출을 하던 나는 정윤이에게도 이 방법을 전수해 주었고 우리의 조촐한 양꼬치 모임에 불러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밤중에 나가서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 간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한국처럼 밤에도 할 것이 많은 곳이 아닌 중국에서 결국 심심함에 굴복하여 나를 따라나섰다. 사랑은 어려웠지만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쉬운 것이 20대들이다.
정윤이도 양꼬치 가게를 보자마자 금세 맘에 들어했다. 주황색 가로등 불 빛 아래 파란색 목욕탕 앉음 뱅이 의자를 깔고 앉아서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박스 채 가져다 두고 우리의 양꼬치가 구워지기를 기다렸다. 훈이형과 J는 대승적 결단으로 나에게 정윤을 밀어주기로 했기 때문에 나를 칭찬하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정윤이 이미 사귀는 남자가 상해에 같이 교환학생에 와있다는 말을 듣자 그저 양꼬치 패밀리에 일원으로 인정하였다. 나 역시 남자친구 있는 정윤이를 어떻게 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양꼬치 패밀리의 홍일점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