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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Apr 10. 2023

J의 세 번째 사랑 (3)

정윤이가 나에게 남성적인 면모를 못 느낀다는 것이 가장 큰 포기의 사유였지만 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기 때문에 나를 택하지 않았다고 금세 위안을 했다. 물론 그녀가 나에게 흥미가 없는 것과 남자친구의 유무는 큰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나의 자존감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정윤이의 남자친구는 시골에서 온 순박하고 나이 많은 복학생으로 정윤이가 인생에서 첫 여자친구라고 했다. 하지만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정윤의 남자친구는 교환학생을 하면서도 여기저기 술자리가 많았고 정윤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렇게 외향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기숙사에 박혀 있었다. 정윤은 같은 학번이고 동갑내기인 나에게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가끔 나 이외의 사람들을 만나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말을 한마디도 못하거나 내 뒤로 숨어버렸다. 가끔 정윤의 남자 친구 와도 함께 어울리는 술자리가 있을 때에도 사람이 많은 자리면 정윤은 몇 잔 마시자마자 기숙사로 돌아가버렸다.


그래도 우리가 모여서 양꼬치를 마실 때면 종종 정윤이는 나와서 어울렸다가 먼저 기숙사에 들어가고 우리는 상해 시내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나가곤 했다. 중간고사가 끝났던가? 정윤이 교환학생들 무리의 술자리에 나를 초대했다. 기숙사와 각종 수업에서 마주치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J와 훈이 형에게는 미리 정보를 흘려 두었기 때문에 늘 가는 한인 술집에서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와 인사를 하며 결국 모두가 다 같이 마시는 자리가 되었다. 우리는 연애는 힘들었지만 친구를 만드는 것은 쉬운 20대들이었다.


"오늘은 양꼬치가 아니라 한식에 소주네? 신기하다"

 

"반가워 정윤 형광등 환한 실내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하하"

 

"응 반가워…"

 

정윤은 부끄러워하였지만 어쩐지 동갑이라면 마음을 놓는 것인지 몇 잔 마신 술 때문인지 J와 단둘이 있어도 금세 편해지는 것 같았다. 20대의 술자리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화면이 물속인 것처럼 기억된다. 그날도 그렇게 모두가 물속에 일렁이는 분위기 같았다. 술고래이고 사교성이 좋은 정윤의 남자친구는 이미 다른 테이블에서 시끌시끌 자리를 주도하고 있었고 훈이형과 나, J 그리고 정윤을 비롯한 몇 명이서 또 다른 무리를 만들어 같이 술을 마셨다. 우리 셋은 나름 영화와 게임에서 배운 갖가지 전략들을 화려하게 펼쳤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물론 하나도 먹혀 들어가진 않았지만 재미있는 바보들로 취급돼 분위기는 좋아졌다.


"J는 격투기를 하는 거 알지? 복근이 장난이 아니거든?"


"응... 그래 보여..."

 

"하하하 만져보면 더 다를걸?"

 

나는 내성적인 정윤이 당황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에 더욱 짓궂게 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 역시 사랑의 아픔에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남자친구가 있던 정윤보다는 다른 솔로들이 있는 자리로 옮겨갔다. J와 훈이형이 내 친구의 자격으로 왔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 역시 젊음의 감성에 이길 수 없는 나이였다.


한참 뒤 술에 취해 흐려진 시야에 J의 몸을 정윤이가 쓰다듬는 것을 언뜻 본 것도 같고 술에 취한 나의 착각인가? 정윤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만 어렴풋이 하다가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청난 두통과 숙취가 몰려왔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꿈이었는가 현실이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디부터 맞는지 어제 몇 명의 여자들을 노려보며 눈빛을 전달하려 했는지 이불을 발로 차며 술기운을 빌어했던 나의 청춘의 헐떡임에 괴로워하였다.


J와 다르게 나는 내 신체가 나에게 주는 살아있다는 감정들의 무단 강점이 버거웠다. J는 이런 감정들과 사랑을 나누고 때로는 맞서 싸웠다면 나는 그 감정들의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까봐 그리고 그 너머에 또 허무하게 아무것도 없을 까봐 두려웠다. 침대에 웅크리고 내가 저지르고도 내가 한 일 같지 않던 어제의 나를 잊고 싶었다. 그러던 중 내 방문을 J가 박차고 들어왔다. 기숙사는 야간에는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는 J가 아침 댓바람부터 웬일인가 하였다.


"흐흐흐 야,, 어제 나 여기서 잤다."

 

"응? 어디서? 기숙사에서?"

 

"응 정윤이 방에"

 

"어떻게? 여기 입구에서 막는데?"

 

"창문 타고 기어들어 갔지 하하하하 그래도 걔 룸메이트가 아침엔 들어온다고 해서 겁나 빨리 나옴 샤워 좀 하자"

 

"응? 걔 룸메가 안 들어왔어?"

 

"어 정윤이 남자친구 방에서 어제 새벽까지 다들 마셨다 던데? 야 이거 봐라"


굳이 내 앞에서 옷을 벗어던진 그는 온몸에 빨갛게 히키 자국이 가득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그 쪼가리 자국들을 보며 나는 부럽고도 신기했지만 허세를 부렸다.


"뭐야... 뭘 그렇게 티를 내고 난리야 적당히 하는 게 잘하는 거 라구"

 

하지만 머릿속에는 J는 희정 누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그럼 이건 그냥 하룻밤에 일어난 일인가? 내가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현재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내 친구의 너무도 갑작스러운 포스트모더니즘 적이고 미국 시트콤적인 사랑 방식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정윤의 남자친구는 전혀 눈치를 못하는 것 같았다. 기숙사는 야간에는 밖에 나갈 수 없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지되었다. 또 아무리 성인이라고 했지만 청소년을 졸업한 지 이제 1,2년이 되던 20대 우리들의 순수한 경계심과 또 정윤은 룸메이트가 있는 방이었기 때문에 정윤이의 연애 역시 룸메이트와 기숙사의 학생들이 모두 적당히 개방적이지만 또 아직은 보수적인 우리들 만의 ‘정도’를 지켜가는 연애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자주 놀러 오는 J에게 정윤과 J의 정도를 한참 벗어난 연애 얘기를 생중계로 들었다. 나는 수줍음 많던 정윤의 열정이 놀라웠다. 가끔 정윤의 룸메이트가 다른 방에 간 날이면 급하게 J에게 연락을 해서 정윤의 방에 J가 숨어들던 방식으로 한동안 만나다가 이제 정윤이가 밤마다 기숙사를 탈출하여 J의 집으로 숨어든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말도 잘 못 섞고 수업 시간에 발표도 제대로 못하는 작은 목소리의 정윤이가 밤마다 기숙사 벽을 타서 탈출을 한다는 데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J는 도대체 정윤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진지하게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또한 정윤이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J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두려웠다. 아마도 그녀의 남자 친구인 선배의 입장보다는 희정 누나를 사랑한다고 한 J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또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 다면 둘 다 너무나도 복잡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정윤이가 한국으로 돌아갈 마지막 학기였는데 남은 시간이 촉박해질수록 점점 더 대담해져 갔다. 비가 억수 같이 오는 날에도 기숙사를 탈출하여 J의 집에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감기에 걸려서 앓아 누었는데 남자친구인가 정윤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기숙사에 형의 간호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였고 나는 착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J의 사랑이 자주 그랬듯 이번에도 그녀가 귀국을 하자 이 밀회는 일단락되었다. J는 가끔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그녀를 만났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남자친구를 차버렸는데 J 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는 J의 연락 역시 받지 않았다.


나는 정윤이 또한 J와 같은 방식으로 삶과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친구였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정윤이의 소식 또한 듣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겨울 방학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J는 희정 누나와 사귀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작전을 짜고 작업을 들어갈 때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학과 내에 J의 식스팩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희정 누나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J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둘은 연애를 하게 되었고 금방 내가 술을 채워 두었던 그 집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J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랑 소식을 나에게 연달아 생생하게 중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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