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고래 투어를 가보자
출장 일정이 3주나 잡혔다. 그중에 2주를 실리콘 밸리에 가야 했다. 주말이 앞 뒤로 3번 총 6일이 있게 되었다. 6일의 휴일 다들 뭘 할 것이냐고 물어봤다. 금문교, 샌프란시스코 시내관광, 아예 근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가서 캠핑이나 투어를 하거나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까지 다양하게 추천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와서 하필 고래 본 글을 남기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괴팍한 성격 탓으로 남들이 추천하는 게 나에게 가치가 없으면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8개월간 있으면서도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지 않았다. 뭐 그냥 한번 가볼 법도 하지 않느냐 나도 생각했지만 초반에는 뭐 다른 곳들을 가느라 안 갔고 후반부로 갈수록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렇다고 내가 어딘가를 꽉 차게 계획을 세우고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못 간 건 아니다. 빨래하기, 집에 누워있기, 맥주 마시기 같은 일상에게도 계속 순위가 밀리다가 결국 내가 왜 그 동상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 봤다. 뉴욕에 언제 또 오겠냐? 뉴욕에 왔으면 자유의 여신상은 다들 봐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답변은 나에게 내가 왜 자유의 여신상을 봐야 되는가에 대한 답변이 되지 못했다.
뉴욕도 그랬는데 애초부터 생각도 없던 샌프란시스코에 내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금문교가 멋있다는데 봐야 되나?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금문교가 나에게 가치를 갖는 건 혹성탈출에서 유인원들이 금문교를 건너가는 장면이 멋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문교가 나에게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장소인 것이다. 아, 그리고 드라마 빅뱅이론의 주인공들이 캘리포니아에 살지 않나? 생각을 했는데 배경이 항상 방안이라 또 어딘가에 가야 될 이유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가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고래를 볼 수 있다는 기사를 봤다. 고래보기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다. 우영우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고래 덕후라는 새로운 분야를 선사하기 전부터 나는 고래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영우 덕분에 고래에 대한 나의 애착이 더 이상 매우 괴상한 취향이 아니게 되어 반갑기도 하고 뭔가 나만의 분야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https://www.sftravel.com/article/guide-whale-watching-san-francisco
샌프란시스코만에 고래가 나타났다는 기사 매우 많다.
내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진다. 아마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시골에 살기 전에도 금붕어를 사달라고 졸랐다고 하니 그냥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호가 아닌가 싶다. 고래가 물고기는 아니지만 그 거대함과 자유로움 당당한 자태는 나를 매료시키 충분했다. 거기다가 어린 시절 세계 명작 문고에 있던 모비딕(당시엔 백경으로 번역되어 있었다.)의 내용은 나를 고래에 완전하게 빠져들게 했다.
나의 고래 사랑은 우영우처럼 유별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 배경화면을 온통 고래로 채워두고 바다에 나가거나 어디 멀리 배를 타고 가면 혹시나 고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비행기로 바다 위를 날아갈 때면 혹시라도 고래의 흔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사색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해서 넋을 놓고 바라본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고래를 꼭 찾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부릅뜨고 바다를 살펴보았다.
어린 시절은 책이나 티브이에서 열광적으로 고래를 찾아다녔다. 자라나서 활동 범위도 넓어지고 돈을 벌게 되어 심심치 않게 바다에 나가게 되자 직접 고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고래를 추적해 온 수십 년간의 여정에서 고래를 만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출장에서 고래를 직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모비딕을 통해 고래에 대한 환상을 키웠으니 당연히 향유고래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향유고래는 멸종 위기 종으로 개체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쩐지 요즘엔 향고래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그렇다면 가장 큰 흰 긴 수염 고래나 혹등고래를 보고 싶었다. 샌프란시스코만의 고래를 검색해 보니 혹등고래 사진이 많았다. 크기가 11-16M까지 자란다고 한다. 가슴이 설레었다.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니 샌프란시스코는 가끔 길을 잘못 든 고래들이 출현했고 샌프란시스코 근처 도시에 아예 고래를 관찰할 수 있는 투어가 있었다. 몬테레이라는 도시였다. 신기하게도 멕시코 출장에서 방문한 도시와 이름이 같았다. 출장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투어를 예약했다. 시간은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오전, 오후 2타임이 있었고 3개 정도의 업체가 있었다. 보통 저렴한 쪽을 선택하지만 어지간히도 잘 없는 나의 희망 사항 중 하나라 비싼 쪽으로 예약을 했다.
예약을 잡고 나서 출장 내내 내 머릿속은 고래로 가득 찼다. 고래를 볼 수 있을까? 날씨 때문에 배가 못 뜨면 어떻게 하지? 막상 바다에 나갔는데 고래 보기는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돌고래 몇 마리 보고 끝나는 건 아니겠지? 등등 걱정과 궁금함들이 가득했다. 몬테레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전으로 2시간, 내가 출장해 있는 산호세에서는 1시간 정도 걸렸다. 가는 길에 길모이라는 도시에는 아웃렛도 있다. 폴로 옷도 한 벌 한국의 반정도 가격에 산 것 같다.
가는 길에 펼쳐져있는 미국 남부의 아름다운 풍경은 안 그래도 설레는 내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목장과 골프장,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는 끝없이 푸르른 초원과 미세먼지 없이 파란 하늘, 우리나라처럼 축사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너른 목장에 한가로이 있는 소들이 행복해 보였다.
미국의 엄청난 물가 덕분에 나의 예산은 부족했고 2성급 호텔을 예약했다. Merrit House 호텔이라는 호텔이었다. 환전해서 20만 원 정도였는데 사실 미국 물가를 감안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착한 숙소는 너무나도 좋았다. 방의 분위기는 건축의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빅토리아풍의 고풍스러운 장식이었다. (빅토리아풍이 뭔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옛날이다.) 방안에 천장이 웬만한 2층집 정도의 높이였고 방안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장작은 공짜로 2개를 줬다. 벽난로를 처음 사용해 봤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여행온 보람을 느꼈다. 숙소에 투어 10% 할인 브로셔가 있었는데 나는 이미 예약을 해버렸기 때문에 사용하지는 못했다.
투어 전날 돌아본 몬테레이 항구는 매우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한국의 통영 분위기가 좀 난다고 할까? 어촌 마을에 작은 동산과 꽃밭, 휴양시설들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따듯한 남쪽이고 관광도시라 노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네 솔직하게 저는 맥주 살 돈이 필요합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팻말을 든 노숙자마저도 대도시에 비해 낙천적으로 보였다.
항구는 어촌 부두와 관광 부두가 나뉘어 있었다. 관광 부두에는 기념품 가게 들과 음식점들이 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Cafe Fina라는 음식점이 가장 평이 높았다. 입구에 사람 좋게 생긴 주인이 접객을 하고 있고 내부는 선실처럼 꾸며진 식당이었다. 역시 대중들의 선택을 옳다. 클램차우더와 생선 꼬치를 시켰는데 정말 맛있었고 주인은 친절했다.
다음날 9시 출항이었고 부둣가에는 8시 30분까지 가야 했다. 도착하니 투어사 배마다 손님들이 이미 북적이고 있다. 돈을 내고 윗갑판을 끊었다. 윗갑판이 약간 비싼데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 해양생물학자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니 몬테레이는 고래들이 이동하고 새끼를 키우고 먹이 활동을 하는 루트였다. 계절 별로 볼 수 있는 고래가 달랐다. 달력을 보니 3월 말에는 회색고래, 혹등고래, 범고래, 돌고래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일정도 딱 맞춰 찾아왔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배가 출항을 하면서 부둣가에 바다사자, 물개, 수달들이 가득 사는 것을 보았다. 사실 야생에서 이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신기했는데 이날만은 이 친구들이 흔해 보였다. 배로 한 시간쯤 가서 한 시간 정도 고래를 찾아다니고 한 시간 뒤에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가장 떨렸다. 혹시나 고래를 못 찾으면 어떻게 하지? 오늘은 운이 없어서 그레이 고래만 보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이 계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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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2층의 쾌속선이었다. 1층은 실 내고 2층은 창문이 없는 야외였다. 2층이 더 비싼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고래가 나오면 사람들이 고래를 보러 모여드는데 1층은 실내에 좌석이 이동하기 불편했다. 2층은 좌석이 좌우로 이동하기 좋아 사람들이 딱히 좌석을 정하지 않고 '2시에 고래 출현!"이라고 누군가 외치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을 했다.
선원들은 투어를 총괄하는 생물학자 아저씨 한 명과 사진작가, 연구 대학원생이 있었고 선장과 안전요원들이 있었다. 모두들 친절했고 전문적으로 보였다. 생물학자 아저씨가 고래와 몬테레이에 대해 계속 설명해 주는데 유익한 정보들이 많았다. 관광객이 늙은 부부에서 어린아이, 청소년 등 다양해서 눈높이에 잘 맞춰서 설명을 해줬다. 아쉽게도 한국어 자막은 나오지 않아 영어 듣기 능력을 최대한 키워야 한다.
배를 타고 가면서 들으니 몬테레이만은 고래들이 먹이 활동을 하거나 어린 개체들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고래를 못 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투어 배들끼리 무전으로 고래 출몰 지점을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적게 보는 날은 있었도 허탕 치는 날은 거의 없는 듯했다. 선장이 다른 배들과 연락을 해서 고래가 있는 지역으로 배를 움직여 갔다.
"이제 고래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역시 일어나서 배의 진행 방향을 살피며 고래를 찾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나이가 지긋하고 전문적인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제일 먼저 고래를 발견했다. "고래다!" 아저씨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나의 눈에도 고래가 들어왔다. 멀리서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두시 방향에 고래가 보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소리와 탄성을 지르며 2 시 쪽 갑판으로 몰려 갔다.
배는 속도를 높여 고래 옆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 고래는 몇 번인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가 잠수해 버렸다. 배는 고래가 잠수한 지점 근처를 돌며 고래가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보통 한번 잠수하면 5-10분 뒤에는 다시 올라옵니다. 잘 살펴보세요" 모두들 고래가 사라진 지점 근처를 살펴보았다. "4시 방향에 고래다!" 누군가 또 외쳤다. 이번에는 천천히 머리부터 떠올라 숨을 몇 번인가 쉬고 다시 물속으로 잠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은색에 흰점이 있는 게 혹등고래 같았다. "혹등고래군요" 해양학자 아저씨가 확인해 주었다.
그 뒤로 배는 다른 배들과 연락해서 그레이 고래, 혹등고래 등을 따라잡아 보여주었고 우리가 발견한 고래를 다른 배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날 총 11마리의 고래를 보았다. 그리고 돌고래 떼를 만났다. 생물학자 아저씨의 설명으로는 평균보다 조금 많이 본 편이라고 했다. 범고래를 보지는 못했다. 범고래가 나타나면 고래들과 쫓고 쫓기는 싸움이나 돌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 장면은 신기해서 보고 싶기도 했고 고래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 반반이었다.
고래가 배 아주 가까이로 오는 일은 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배로 쫓아가면 점점 멀리 도망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인터넷 사진처럼 배 바로 옆으로 붙어서 그 거대한 크기를 보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각종 매체에서 봤던 물 위로 솟구쳤다가 장엄하게 떨어지는 장면 역시 보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다. 잠수해 갈 때 큰 꼬리를 본 게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아마추어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기는 매우 어렵다.
돌아오는 길에 고래 3마리가 배를 계속 따라오며 물줄기를 뿜었다. 어느 시에서 읽었듯이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손짓 같았다. 한참을 따라오다 방향을 바꿔서 물줄기는 멀어져 갔다. 3월 말이었지만 두꺼운 외투가 필요할 정도로 추웠다. 부두에 내리니 어제 맛있게 먹었던 Cafe Fina의 디저트 바우처를 주었다. 안 그래도 다시 갈 생각이었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모비딕의 초반 부에 주인공이 비바람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여관에 들어가 클램차우더를 먹으면서 몸을 녹이는 묘사가 있었다. 나도 이스마엘처럼 얼어붙은 몸을 녹여줄 클램차우더가 필요했다. 클램 차우더와 해물 빠에야를 먹었다. 몸이 녹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But when that smoking chowder came in, the mystery was delightfully explained. Oh! sweet friends, hearken to me. It was made of small juicy clams, scarcely bigger than hazel nuts, mixed with pounded ship biscuits and salted pork cut up into little flakes! The whole enriched with butter, and plentifully seasoned with pepper and salt…we dispatched it with great expedition.” ~Moby Dick by Herman Melville
이것으로 나의 인생에 버킷 리스트였던 고래 탐방기를 달성했다. 아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고래가 나오는 지역에서 스킨스쿠버도 할 것이고 더욱 근접해서 고래를 볼 기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몇십 년을 상상해 왔던 고래를 처음 만날 때 "2시에 고래" 외침을 듣고 그 물줄기가 하늘에 뿜어지던 장면만큼의 떨림을 또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