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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Mar 19. 2023

Lady frangipani

사랑하는 사람과 꼭 같이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아직은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어린 시절 언젠가 사랑하는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온다면 꼭 같이 오고 싶은 장소들을 소중히 모아뒀다.  꽤 오래 동안 세계 각지에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면 같이 가 볼 장소가 늘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가 돌아올 가능성을 줄었지만 나는 간절한 내 진심이 그녀에게 닿을 거라는 다분히 디즈니 적이고, 할리우드 적이고, 한국 드라마 적인 세뇌교육 덕택에 나홀로 일방적인 마음을 점점 더 키워 갔다. 


어릴 때에는 그런 사랑에 빠져 있는 내 모습과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오랬동안 사랑했던게 아니라 그런 사랑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는 것을 먼 훗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쨌든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중이었고 내 사랑은 영원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민망한 구애를 하고 차이면 나는 외로워서 그녀를 잊기 위해서 였을 뿐인 구애였다고 자위했다. 물론 나를 찬 그녀들도 같은 이유를 들어 나를 찬 그녀들의 모짊을 포장했다.


줄기차게 그리고 민망하게 구애를 했던 그녀들이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면 나는 다시 첫 번째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런 어중간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 했기 때문에 나는 첫사랑을 오래도록 그리워했다. 나는 타의에 의한 순애보를 걷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점점 늘어가는 언젠가 같이 가 볼 장소 중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찾아낸 레스토랑이었다. 지금이야 그런 감성의 바들이 흔해졌지만 약간 올드하면서 촛불이나 주황색 조명을 달고 통유리 창으로 장식된 곳이었다.  그 집이 가장 좋은 점은 큰 나무 아래에 차려진 야외 좌석이었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 쌓여있고 주황색 꼬마전구로 장식된 한그루의 나무로 둘러 쌓인 술집은 도시 속에서 나무에게 보호받는 작은 숲 같은 아늑함이 있었다.


상해는 습기가 많아서 야외 활동을 하기 좋지 않지만 상해에도 선선하거나 포근한 날씨가 있다. 그런 날 여기에 오면 나뭇잎의 싱그러움과 나무줄기의 깊은 냄새가 상해의 습기를 통해 더욱 진하게 전달되었다. 지금 같으면 이끼향, 나무 향이 가득한 레드와인을 시키거나 상큼한 화이트 와인을 시키겠지만 그 당시 나는 아직 와인을 마시지 않았고 맥주나 칵테일을 시켜서 마셨다.


수년간이나 계속된 나의 강제적인 순애보 기간 동안 내 순애보의 그녀는 당연히 못 데려갔지만 그렇다고 구애했던 그녀들 또한 데려가지 못했다. 상해에는 장기간 체류한 적이 별로 없었고 해외여행에 까지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면 아마 반정도 구애애 성공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 순애보 기간 동안 그곳에는 그곳의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내 술친구 친구들만 갔다.


그렇게 그 장소가 낭비되고 10여 년이 흐른 뒤 나는 중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다. 마치 영화처럼 나는 선배의 결혼식에 갔다가 그녀의 결혼을 봤기 때문에 이 당시에는 그녀를 완전히 잊은 시기였다. 이런 비극은 꼭 영화처럼 찾아온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중 멀리 알고만 지내던 사람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으로 주재원 파견을 온다고 했다. 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하필 지금 이순간 주재원 파견을 온다고 그녀에게 연락이 오는 순간부터 이미 손자들의 재롱 잔치까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몇 번의 연결을 통해 상해에 도착해서 아직 제대로 정착도 안 한 그녀를 내 나름의 갖은 이유를 대어서 나의 비장의 장소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


이제 막 연두색이 진해져 녹색이 된 나뭇잎과 때 이르게 시작된 상해의 여름 공기가 나뭇가지들과 나뭇잎의 향을 공기 중에 불어넣었다. 나뭇잎들이 쌓여있는 야외 자리를 이동하는 걸음 걸음 마다 쌓여있는 낙엽과 잔가지의 향이 피어 올라왔다. 우리가 자리에 도착하자 종업원이 촛불을 켜주었고 촛불이 데운 공기는 숲 속의 향을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좌석은 적당히 널찍하게 자리를 두고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가 들어와 앉았다. 마치 야상곡의 클라이맥스처럼 숲의 향이 가득한 곳에 그녀가 까만 긴머리를 찰랑이며 옷 사이로 하얀 피부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향기가 숲의 향기에 더해졌다.


그리고 상해의 공기에 데워져 가는 화이트 와인의 향이 채워졌다.


은은한 음악소리와 숲의 향, 약간 더운 바람에 실려오는 그녀의 향기, 그리고 차가운 화이트 와인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술집은 문을 닫았다.


물론 그녀는 나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그날 얘기를 하면서 알았고 그 뒤로도 계속 알게 되었다.


 내가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 왔던 그 장소는 그녀가 와서 완벽해졌다. 그리고 그곳이 문을 닫음으로써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은 오롯이 그녀가 소유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곳에 대한 나의 기억과 향기, 분위기는 그녀와의 시간으로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사라졌다.


그녀와 나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 동안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끔 그녀를 만나거나 소식을 듣곤한다. 그 때 마다 나는 그날의 그곳의 향기와 공기들이 떠오르며 나무향이 가득한 숲에 프랑지파니가 피어나는 모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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