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참이던 시국에 경조사가 있었다. 사람도 모이기 어렵고 그렇다고 알리지 않기도 뭐해서 SNS에 내 연락처와 계좌번호를 올렸다. 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계좌번호를 적으면 싫었는데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부은 돈을 다 잊고 이 악습을 깨 보자 하는 용기를 갖기엔 그 액수가 너무 컸다. ㅎㅎ
정말 남들이 말한 대로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를 이렇게 생각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돈이 오기도 하고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아니 어쨌든 우리 사이 겨우 이 정도? 싶은 액수가 오기도 했다. ㅠㅠ 인간관계가 숫자로 표현되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뭐 그렇지만 대부분은 사회적 통념대로 주고받고 하면서 연락도 한번 하고 옛날 생각도 떠올리면서 정이 또 오고 간다고 믿고 싶다.
그런 와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형 저 ㅇㅇ이에요."
(당장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어... 그래... 이렇게 전화 줘서 고맙다. "
"형 저 형한테는 꼭 신세 갚고 싶어서요.."
"아휴 뭘 신세를 갚아 그냥 이렇게 챙겨줘도 고맙지"
"진작 연락하고 싶었는데 연락처를 몰랐다가 이번에 글 보고 알았어요."
가물가물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름. 대학교 후배였나? 전 회사 동료였나? 미국에서 사귄 친구? 중국에서 사귄 친구? 계속 기억의 회로를 되살리며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OO... 분명히 익숙한 이름인데.. 그저 그런 안부와 고마움의 표시를 하며 상황을 넘기고 있었다.
"형.. 저 기억 안나는구나..."
결국 걸려버렸다.
"형.. 저 군대에서 OO과 기억나죠?"
"아!!! 너 OO이구나?"
사실 이때도 기억이 안 나고 있었다. 나는 학사장교로 지원을 해서 군생활을 3년을 했다. 일반 병사들은 라떼에 이미 2년 미만의 복무 기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앞 뒤로 수백 명의 병사들이 나와 같이 복무를 했다. 그러고 나서 10여 년이 흘렀는데 이미 벌써 망각의 강 저 멀리 흘러가는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 기억이 났다. 10년 전 나는 책에서만 읽은 장교들의 생활을 꿈꾸며 장교에 지원을 했다. 이 문장만 읽어도 대한민국 대다수의 남자들이 '푸핫 이런... 뷰웅(자세한 뒷말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나는 고지식했고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 디즈니 만화에서 보던 아름다운 왕국에 갔다가 현실을 보게 된 아이처럼 나는 소설과 영화와 매우 다른 군대의 현실, 그리고 또 현실을 개척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박약으로 그저 그런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OO이도 나와 같은 친구들 중 하나였다. 몇 번이나 보직을 옮겨 간부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된 경우였다. 군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경우는 두 종류다. 똑똑하거나 일반 전투 병에서 적응을 못해서 간부들이 사고를 못 치도록 감시하는 경우 거나..
ㅇㅇ이는 일처리가 느리고 마음이 약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싹싹하게 비비지도 못했다. 선임들이 윽박질렀고 후임들은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가끔 그 친구가 선임들과 문서실에서 나오는걸 몇 번 보고도 나는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몇 번은 왜 그러냐 물어봤고 그냥 일이라고 답변을 듣는 정도로 신경을 썼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도 동조했을 것이다.
'그래 이제 완벽히 기억났다!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10년 만에 연락할 이유가 없는데?'
"형 저는 그때 너무 고마웠어요."
"응 뭐 내가 뭘...(아 혹시 나 이 친구 괴롭혔나? 아니면 방조?)"
"저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요... 형이 그냥 바로 보내줬잖아요... 일단 다른 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부대일 신경 쓰지 말고... 나갈 준비 하게 해 줬잖아요... 저는 그때 너무 고마워서 다짐했어요. 형이 경조사 있으면 꼭 내가 챙겨줘야겠다."
그제야 모든 게 생각이 났다. 어느 날 내가 당직 근무가 있을 때 그 친구가 하얘진 얼굴로 쭈뼛주뼛 찾아 들어왔다. 조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당장 내일 나가야 하는데 그날 부대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조직체계가 그렇듯이 개인의 일보다 조직의 일이 우선이 된다. 그리고 군대라는.. 아니 어쩌면 이익을 좇는 기업도... 개인에 사생활은 희생해야 될 무엇인가가 된다. 그래서 쭈뼛쭈뼛 찾아온 것이다.
내가 무슨 큰 사명감과 인류애가 발동하여 그 친구를 내보내 준 것도 아니고 큰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나 자신도 그렇게 조직의 이익에 내 개인 사생활을 희생하고 있었다. (뭐 명절 근무라든지 뭐 휴가 따위? 퇴근 후 내 사생활에 대한 추적? 쓰다 보니 딥 빡치ㅌ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 쟤 병가로 휴가도 오지게 쓰고'
'근무 도 다 다시 짜야 됩니다.. 아'
'아니 내일부터 OO훈련 들어가는데 쟤 OO병이에요... 내일 까지 이거 마무리해야 합니다.'
내가 날라리 상황근무를 스며 책상에 군화 올리고 미드 몰아보기를 하고 있을 때 밤샘 작업을 하던 행정병들이 일을 하다 말고 뛰어왔다.
'그래서? 경조휴가 규정 나보고 어기라고?'
사실 OO 이를 감싸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나도 똑같은 사유들로 내 권리들을 포기당하고 있었기에(물론 병사들 보단 덜했지만) 반감이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평소에 하지도 않던 디테일이 떠올랐다.
'OO이 너 당장 집에 내일 아침에 간다고 전화하고, 그리고 방해받지 않게 당직실 와서 휴가 나갈 짐 싸, 그리고 아침 기상 하자마자 대대장님 출근 차 나가는 길에 얘 내려줘. 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 상을 당했는데, 지금 뭐 국지도발이야? 전면전이야?'
그 정도까지가 나의 소심한 반란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친구의 소속 중대장이 나보다 후임이었고 나는 군대에서 제일 무섭다는 말년 중위 그것도 ROTC후배들을 먼저 내보낸 3년 차 중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무섭다는 게 뭐 권력이 있다는 게 아니라 이제 전역할 때가 다 되었고 3년이나 지속된 군생활로 규정과 원칙을 지켜달라고 대들기(?)가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저 정도까지 참견을 하고 나서 나는 다시 밤샘 당직의 미드와 라면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남들보다 더 가까웠던 할어버지 상을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군대에서 당했다. 그 와중에 조직의 생태라는 게 조직에서 도태된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는 나도 그전에도 그 뒤로도 잘 겪어봐서 안다. 물론 내 일이 아니면 다들 잘 안 보이는 법이다. 또 그는 내 직속 부하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가 들었을 모욕적인 말들과 받았을 압박은 이제 와서야 겨우 상상이 간다.
전역을 하고 십여 년 동안 수많은 부하들과 동료들과 더러는 연락이 끊기고 또 연락이 아직도 되기도 한다. 하지만 10년 만에 불쑥 찾아온 전화 한 통화로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시 사회로 돌아와 나도 사회생활에 개인의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희생하라고 그래야 나도 산다고 압박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예 그런 걸 생각지도 않는 게 프로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누군가의 따듯한 도움으로 헤쳐나간다.
10년 만에 받은 그 전화로 그 친구는 나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내가 더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다시 복귀한 사회에서 나도 다시 OO처럼 여기저기 밀려나기도 하고 풍파를 겪으며 애써 담담한 어른인 척 가면을 쓰고 살았다. 10년 만에 온 OO의 연락은 내 지나간 3년이 그저 의무의 이행과 날려 버린 시간이 아니란 것을 말해준 것처럼 기뻤다. 군대에서 내가 찾던 소설과 영화에서 보던 그런 멋진 장교의 역할을 나도 모르게 수행한 것 같아 지난 3년이 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OO처럼 밀려나 있는 나도 과거에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새삼 용기가 생겼다.
고맙다! 우리 다시 열심히 살자, 그리고 서로 도우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