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희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가 어느 날 뜬금없이 말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랬다. 지희랑은 기숙사에 들어간 것을 도와준 이후 종종 만나서 술도 마시고 같이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J가 그의 짦은 사랑들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나름 한눈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지희와는 한동안 연락이 뜸해졌었다. 그런 와중에 J가 지희가 좋아졌다고 하는 것은 갑작스러웠다. 물론 지희도 귀여운 외모였고 성격도 싹싹하고 착했지만 저번 사랑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너무 의외의 인물과 사랑을 시작해 버렸다. 물론 아마도 내가 모르는 J의 인맥 안에서 이미 수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를 겪은 뒤 나와 공동으로 아는 지희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서가 찾아온 것 이라고 생각한다.
지희는 집에 돈이 많은 유복한 집의 자식이었다고 했는데 돈 많은 집 자제답지 않게 우리와 잘 어울려 놀고 우리의 일탈을 보면서 징그러워하면서도 재밌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인 사회가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에 개방적이면서 보수적이었던 새 천년의 조신한 한국인 여성답게 지희 역시 외국인은 빼고 한국인들과 두루두루 사귀어 보았고 그중에 꽤나 많은 쓰레기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마다 우리 동갑내기 친구들이 얘기도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었다. 그러던 중 마침 기억에 남을 만큼 쓰레기였던 꽤 오래 동거를 한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된 시점을 J는 공략시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희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다가 부보님께 걸려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휴대폰과 유선전화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희는 남자 친구와 동거하던 집에 전화기를 설치해 두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둘이 함께 쓰던 침대맡에도 전화기를 설치해 두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지희의 아버지가 전화를 했고 그녀가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 전화벨이 계속 울리자 술 취해 자고 있던 그녀의 동거남이 전화를 받아버렸던 것이다.
"여보세요"
"음? 거기 이지희 학생 집 아닌가요?"
"맞는데요? 지희 샤워 중이니까 조금 뒤에 거세요"
"..........."
"아 저기 나오네 지희야 전화 좀 받아!"
"아, 누구인데~ 잠깐만 옷 좀 입고"
그 뒤에 다시 전화통이 불이 나게 울렸고 남자 친구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희에게 골이 아파 죽겠으니 전화를 받으라며 짜증을 냈다. 전화를 받은 지희는 '아니 그게 아니라 친구들과 술을 늦게까지 마시고 애가 잠들었다. 내가 샤워하고 나온 게 아니라 그냥 화장실을 쓰고 나온 것이다. 걔 말고 다른 애들도 있었다. 왜 갑자기 중국에 오느냐 내가 뭘 했다고 오느냐'라는 통화를 남겼고 이런 한바탕의 해프닝을 겪은 뒤 동생이 부모님의 엄명을 받고 두 학기 동안 언니를 감시하러 온다는 소식에 둘은 부랴부랴 집을 다시 분가하면서 가구 분할 및 돈문제로 심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동거남은 그의 저열한 성격과 상스러운 욕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런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희는 매우 상심하고 돈도 못 받았다고 매일 우리와 술을 마시며 울었다. 그 틈을 바로 J가 노린 것이었다.
“지희 아까도 술 마시면서 울던데 너무 귀엽지 않냐? 볼따구를 꼬집고 싶었다”
“맞아 지희 귀엽지”
“남자 친구랑 싸우고 지금 힘들어하는데 딱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맞아 지금 작업 들어가면 100%지! 좋아! 그럼 어떻게 사귀자고 할 건데?"
그 당시 우리는 여자가 맘에 들기만 하면(사실 어쩌면 이쁘다고 생각이들면) 고백을 하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여자들과 분리되어 정상적인 교류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연애를 가르쳐준 것은 할리우드 영화와 디즈니,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잡지 맥심들에서 건건너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앞에 나타난 예쁜 여자들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라 믿었고 우리가 진심을 다한 사랑이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이루어 질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게임의 퀘스트를 진행하듯이 진심으로 멋지게 고백을 하면 그녀도 우리의 정성에 반하든지 뭐 운명에 이끌리든지 그렇게 되어서 아무튼 사랑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모든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남자주인공이 나타나면 여자주인공 바로 나타나고 바로 서로 사랑하지 않나? 아무튼 ‘우리가 좋아하는 ‘진심!’은 통한다!’라고 생각하였고 먼 훗날까지 이런 생각들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어색한 상황을 겪었다. 지금이라도 할리우드 영화사와 모든 애니메이션 제작자 소설가들을 고발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그 뒤로 세월을 거치며 그런 일들은 주인공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과 적어도 그녀의 인생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이 되려면 그녀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줘야 된다는 것을 나중 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을 전혀 모를 때 이므로 우리 둘은 시시덕거리면서 고백을 멋지게 할 준비를 하였는데 그때 한참 유행하던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에서 보여준 방식대로 내가 그녀를 중간고사 공부를 하자고 카페로 꼬여낸 뒤 카페 창너머로 J가 촛불과 불꽃을 밝힌 채 카드로 고백을 하기로 하였다. 훈이형과 상의를 했다면 분명 말렸겠지만 형은 그때 한창 뭔가 바빠서 우리와 조금 뜸해졌을 때였다. 우리는 이 방법이면 거의 안 넘어올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매우 자신만만해하며 준비하였다.
"지희야 오늘 너 어디서 공부하니?"
"별 계획 없는데 도서관이나 갈까 하고"
"도서관 더러워서 냄새도 나고 우리 그냥 너네 집 앞 카페에서 하자"
"아... 그럴까? 그런데 나 우리 집 앞 카페는 싫은데 우리 오각장쪽 카페로 가자!"
"어? 너네 집 앞 카페가 싫다고? 아니 거기에 준비를 다했는데?"
"응? 무슨 준비를 해? 나 1층 카페는 점원이 집적거려서 싫어 우리 딴 데로 가자"
"무... 무슨 잠깐, 나 문자 좀"
나는 황급히 준비하고 있는 J에게 문자를 보냈다.
"(J 비상비상!!! 오각장으로 간다는데?")
"(아니 지금 바꾸면 어떻게 해? 1층에서 하라고 해봐!)"
"(거기는 점원이 집적거린다는데 어떻게 거기서 한다고 해?)"
"(네가 잘 막아준다고 해봐 그러면 되지 않냐!)"
"저기.....? 우리 어디서 공부해?"
"아... 하하하? 우리 1층에서 그냥 하자 멀리 가기도 귀찮고 그냥 내가 네 남자친구인 것처럼 보이면 편해지지 걔도 한동안 집적거리지 않을 거고 오히려 좋지 않을까?"
"아... 그냥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가 내 남친인 척을 한다고? 하하! 그러자 그러면"
"(J야 성공성공 다시 깔아 불꽃)"
"응... 그럼 우리 1층 카페로 가자
지희와 함께 1층 카페에 들어가며 나는 J가 이것저것 준비해놓은 흔적들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지희가 들어서자 키가 멀대 같이 큰 알바 생이 지희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하다가 함께 들어서는 나를 보고서는 분위기가 냉랭해지는 것을 보았다. 음료를 시키고 시험공부를 조금 하다가 요란스러운 불꽃이 터지고 하늘을 향해 폭음을 울리며 불꽃들이 발사되었고 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사람들도, 지희에게 집적대다가 내가 같이 와서 온갖 친한 척을 하자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아르바이트생도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도 모두 구경을 나왔다. 학교 앞 카페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그 무리 중에는 우리 기숙사 친구들도 있었고 현주도 용일이도 각자 친구들과 공부하러 왔다가 다 같이 구경을 나왔다.
"뭐야 뭐야? 누가 고백 하나 봐 어떡해"
"오 진짜 너무 멋진 거 아냐"
"엉? 쟤 J 아냐? 어???"
"오 그렇네"
나는 짐짓 모른 척을 하였다. 지희는 창가에 달려와 적혀 있는 카드를 읽었다.
"아....... 지희야. 나랑... 엇 아니 헉? 아... 어떡해...."
"와 지희야 축하한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영화처럼 사람들이 멋있게 박수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웃으며 쳐다 만 봤고 같은 학교 유학생들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지희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 J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내심 뿌듯했고 아르바이트생이 그러면 너는 뭐냐?라는 눈빛을 자꾸 주는 것을 견디며 사실 별 공부도 안 되고 왠지 나까지 들떠서 공부를 하다 말고 J의 고백 사건을 핑계로 현주 용일이와 술을 마시러 가서 J의 갑작스러운 사랑에 대해 토론을 했다.
우리는 늘 가던 오각장의 양꼬치 집에 갔다. 그곳은 양철 깡통을 두고 하는 길거리 양꼬치와는 다르게 그래도 식당을 차려놓고 정식으로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숯을 태울 수 있는 화로가 놓여있는 테이블을 두고 의자들을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역시 실내 장식은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타일로 마감을 했고 언제 청소를 했을지 모를 가게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자동으로 돌려가면서 굽는 장치는 나오기도 한참 전이므로 종업원이 와서 구워주기도 했고 우리들이 직접 굽기도 했다. 칭따오 750mL 댓 병을 5위안에 팔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인기 만점이었다. 칭다오를 시켜 먹기도 하고 가끔은 바이웨이나 산더리 맥주를 시켜 먹었다. 외국인 손님들이 많이 오는지 냉장고에 맥주를 보관할줄 아는 신문물의 식당이었다. 하지만 중국 식당의 그 플라스틱 비닐 같은 컵은 똑같았다. 나는 항상 그 컵을 보며 소변 검사용 컵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양꼬치집까지 걸어오는 내내 우리는 J의 고백이야기로 떠들석했다. 현주는 J의 그런 갑작스런 고백이 재밌었지만 너무 이해가 안간다는 내용이였고 용일이는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가 주요한 화제였다.
"J는 대체 언제부터 지희를 좋아했어?"
현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용일이와 나는 신나서 웃음보를 터트리고 있었다.
"아.. 그게 모르겠어 희정 누나랑 헤어진 지도 꽤 되지 않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희 남자 친구랑 아직 안 헤어진 거 아냐?"
"글쎄? 나는 저번에 그 사건 이후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아닐걸? 둘이 또 만나서 울고불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용일이 너도 봤다며?"
"하... 그 형 진짜 양아치야 내가 형만 아니었으면 진짜 줘 패 버리는데"
"암튼 J가 지희한테 고백한 건 진짜 어이없다. 너는 맨날 붙어 다니면서 J한테 좀 정신 차리라 그래, 여기 사회 좁아서 소문 다 난다."
"응... 아 내가 뭘 어쩔수 있나? 사람 좋아하는게 죄도 아니고 뭐..."
"으휴 그게 정상이니? 난 너 아까 지희랑 같이 걸어가는거 보고 나는 너랑 지희랑 잘 돼 가는 줄 알았잖아"
"아 나는 J 도와주느라고 하하하, 양꼬치 탄다 마시자!"
나중에 전해 들은 말로는 지희는 J와 사라진 뒤에 정중하게 J를 거절했다고 한다. 소중한 친구를 잃을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고 동거하던 남자친구 와도 아직 완전히 헤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J와 시작을 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것으로 에둘러 거절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참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며 J를 위로하며 또 현주와 용일이와 다 같이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