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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May 29. 2023

리치와 팬더 그리고 양조위

항주에서 돌아온 뒤에도 츠루미는 내 연락을 받아 주었지만 따로 만나 주지는 않았다. 훈이형과 J는 어학원 여행에서도 너무 많은 여자들에게 들이 대거나 이제 사귀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해버렸기 때문에 학교나 어학원에서의 활동이 어색해진 것 같았다. J는 현주와 사귀면서 훈이형과 나와의 자리만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다시 우리 셋이 어울려 같이 훈이형의 집에서 게임도 하고 소롱포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양꼬치를 먹기도 하고 시내의 클럽에 진출하였다가 새벽에 욕지거리와 함께 땀에 절은 몸을 택시에 태우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훈이형은 한국에서 깨져버린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독학으로 영어를 원어민 처럼 하고 제2외국어인 중국어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훈이형은 잠시 자신과 사귀고는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어버린 리치라고 과일 이름으로 통칭해 부르는 누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팬더곰이라는 별명을 애칭으로 부르는 누나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팬더곰 누나는 주중에는 형과 같이 동거를 하며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송장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지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양조위를 닮은 훈이형은 주말엔 우리와 놀며 리치 누나를 그리워하고 그녀의 싸이월드와 다음 카페 흔적들을 뒤졌다. 일상적인 게시물이나 흔적을 발견해도 그것이 다른 남자가 생겼기 때문이라며 나와 J는 음모론의 대가 다운 추론을 했다.


‘애견 카페에 더 이상 댓글을 달지 않고 있어요… 이거 남자랑 데이트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죠.’


‘싸이월드 배경음악 이거 전혀 색다른 취향인데요, 이거 남친이 선물해 준거네, 남친 R&B 좋아하네.’


'아 이메일 주소 바꿨죠? 지금 기념일 뭔가 시작했죠?"


같은 추론들을 내놓으면 형은


‘리치랑 삼청동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우린 LP를 틀어주는 카페에 같이 들어가서 김광석 노래를 들었다. XX’


곱씹었던 추억을 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고는 우리는 20대 만의 애상과 한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혼자만 상처 받았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수출되었다가 다시 본고장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식 중국집의 분점인 "떴다 철가방'에 전화를 걸어 양장피에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소주를 마셨다. 결국 모든 추적과 회상은 술자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흘러간 주성치 영화, 대사 없이 옛사랑의 흔적을 추적하는 한국영화, 일본 멜로 영화를 보면서 그 누구도 이뤄 본 적이 없다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순결한 첫사랑을 그리워하였다. 그리고는 액션 영화와 격투기 프로들을 보면서 대상 없는 분노와 에너지를 터트리면서 가상의 상대와 쉐도우 복싱을 하였다. 그리고는 폭음과 한계까지 가는 운동,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지는 퇴폐적인 일탈에 핑계를 만들어내었다.


팬더 누나는 주말에만 이루어지던 우리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향연에 대해서는 모른 척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팬더 누나가 점유하고 있던 평일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훈이형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회사에서 팬더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훈이형네 집에서 디비디를 보고 게임을 하다가 팬더누나가 돌아오면 각자의 집에 가거나 J와 나만 나가서 술을 마셨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팬더누나를 뒤로 우리를 배웅하며 그날의 놀이를 끝내는 것이 우리들의 평일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형이 상해의 털게를 먹자고 제안하였다. 아마도 내가 어학원의 과정 중에 세계 3대 진미라는 털게에 대해 배웠다는 말을 하고 며칠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대갑게라고 불리는 상해의 민물게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털게로 불렸다. 집게발에 까만 털이 붙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우리나라의 민물 참게와 같은 종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한강에도 참게가 복원되어 많아졌지만 90년대 한국에서는 환경오염과수로정비 사업으로 참게를 구경하기 어려웠고 나는 소설 속에서만 보던 민물 참게가 중국에는 아직 엄청나게 많고 그게 상해의 미식이라는 얘기에 관심이 생겼다.


우리가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항주와 소주 상해는 중국의 강남이다. 강남은 수많은 운하와 호수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작은 호수들에 사는 생선과 게, 새우, 가재는 강남음식의 주재료였다. 그중에서도 대갑게는 상해 일대에서는 최고로 치는 식재료였고 가장 좋은 대갑게가 나온다는 깨끗한 양징호 주변은 대갑게 철이 되면 교통 체증으로 접근조차 어려웠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대갑게를 그물망에 넣어서 가지고 팔거나 갈대로 묶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길에서 대갑게를 파는 사람이 많았다.


J와 나는 라면 밖에 끓일 줄 모르던 학생들이었다. 또 나는 미식에 관심이 많았지만 J는 음식, 그중에서도 중국음식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갑게 식당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내가 먹어 보고 싶다고 하자 훈이 형이 문득 그런 것도 어학 공부하는 사람의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제법 선배다운 말을 하였다. 하지만 훈이형도 요리를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팬더누나에게 요리를 부탁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판다누나는 우리랑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뜬금없이 요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는 것은 조금 예의가 없는 부탁 같았다.


하지만 20대의 나와 J는 그런 사려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훈이형은 분명 팬더누나가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우리 둘만이 나가서 벌리고 온 평일의 모험이 부러웠는지 팬더 누나에게 상해의 자랑인 대갑게를 한국인들에게도 소개해 줘야 한다며 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만의 자리라고 생각했고 대갑게는 아무리 물가가 싼 중국이어도 고급 식재료였기 때문에 J와 나 그리고 훈이형이 먹을 세 마리와 고월용산이라는 황주를 한 병 샀다. 우리가 대갑게 요리를 딱 세 마리만 부탁하자 팬더 누나는 약간 당황한 눈빛을 보이더니 요리를 시작했다. 칫솔로 대갑게를 깨끗이 싹싹 닦은 다음 황주를 조금 넣은 물에 대갑게를 쪘다. 우리는 누나가 해준 대갑게를 먹고 생각을 넣어 따듯하게 데운 황주를 마시며 과연 중국의 3대 미식은 다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황주 만은 도무지 간장 맛이 나서 좋아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평일 저녁에도 셋이 뭉쳐서 술자리로 떠났다.


그 뒤 며칠 동안 훈이형이 연락이 없었다. 며칠 뒤 평일에 나타난 형은 팬더 누나와 싸웠다고 했다. 팬더 누나는 우리들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다며 서운해하고 형에게 울면서 얘기했고 훈이형은 동생들과 노는 시간을 간섭하지 말라면서 싸움이 커졌다고 했다.  팬더누나는 그때 상해 기준으로도 이미 결혼 적령기를 많이 넘긴 나이였다. 형은 리치 누나를 그리워하며 팬더 누나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할 때 면 리치 누나와의 상처를 꺼내어 더욱 후벼 팠다. 이런 상처는 우리의 일탈에 좋은 이유가 되었다. 팬더 누나는 분명 이런 형의 어두운 계곡 같은 내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형은 왕따를 당한 적도 없었다. 나는 형의 어둠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훈이형의 머릿속에도 청춘이 연주하는 음악이 끊임없이 울린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 음악의 일정 부분은 우리와 닮아 있었다는 점 만을 알고 있었다. 양조위를 닮은 형은  잘 생겼고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수재였다. 형에게는 모든 여자가 쉬웠지만 리치 누나만이 그렇지 않았다. 훈이형은 우리에게 그리고 팬더 누나와 있을 때는 한없이 부드러운 자기의 내면을 보여줬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나 다른 여자들이 있을 때는 매우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모습으로 많은 여자들을 굴복시키고 쉽게 정복할 때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리치 누나는 더욱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고 형이 현재 안정감을 가지고 있는 팬더누나에게는 미안함 감정이 더욱더 커졌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더 해지는 바닷물처럼 훈이형은 청춘의 모순을 더욱더 모순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훈이형은 우리가 보기엔 사회에 통달한 그리고 여자에 통달한 어른 같았지만 그 역시 청춘의 음악에 휩쓸리며 우리와 함께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에서 얻어온 지식들을 논의하는 작은 실내 음악회가 더 어울리는 본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의 어두움은 사회에서 끊임없이 청춘과 남자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압박과 그 압박에 남들보다 더 잘 따랐지만 자신의 내면은 결국 왕따의 희생자인 우리들과 닮아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형과 내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든 생각이다. 상해에서 그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무엇이든 아는 사람이었고 수많은 난공불락의 성을 정복한 정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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