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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Jun 05. 2023

천하제일 무도 대회와 의복

  훈이형이 팬더 누나와 갈등이 많아지고 우리와 연락이 점점 어려워질 때 J 역시 현주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봉착해 있었다. 당연히 그랬겠지만 항주 여행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서호를 걸어 다녔고 전교생이 항주에 놀러 와 있었는데 아무리 큰 중국이라지만 갈 곳이 뻔한 관광지에서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J는 나를 밀어주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대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심하게 다퉜고 그 뒤로도 서로의 차이점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그 다툼의 절정은 격투기 대회의 시점이었다. J와 훈이형 용일이가 다니던 일본에서 만들어져 브라질에 전래된 무술을 중국인 사범이 가르치던 도장에서 중국 격투기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종격투기가 유행을 하고 대회까지 만들어져 여러 스타를 배출해 낸 상황에서 중국에서도 각종 격투기를 연마한 선수들이 세계적인 스타를 꿈꾸며 대회를 열었고 중국에서 제일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외국에 개방되어 있는 상해의 격투기 무도장 역시 대회에 도전장을 내었다. 


"이번 경기에 올인을 하겠다! 최소한 입선은 해야 격투기의 앞날이 있다."


J가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전했다. 지금 생각하면 J는 비장하게 말했지만 나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마 그에게 처음 격투기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격투기는 그냥 취미고 당연히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하면 중국어로 한국에 취업해서 먹고살겠거니 했다. 그가 술만 마시면 하는 '격투기에 인생을 건다.', '단명보다 서러운 건 무명'이니 하는 말들은 그냥 우리가 자주 보던 만화 대사를 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뭐를 이루고 싶니?"


가끔 J는 나에게 물어봤다. 


"글쎄? 고시 공부도 체질에 안 맞고 일단은 군대를 가려고 그다음 전쟁이 나면 기회를 잡아야지"


그때 한창 빠져 지내던 전쟁 만화의 대사를 읊었다. 


"대단한 생각이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다. 하지만 전쟁이 난다면 격투기도 쓸모가 있겠지? 이 주먹이랑 발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하하하 그래 세계를 정복해야지, 지구가 유기체라면 인간은 바이러스라고 너무 숫자가 많지 않니? 이 불합리한 나라도 다 갈아치우고 말이야 솔직히 백인들이 만든 이 세계 질서에 동양인들은 희생양이야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본 영화에서 처럼 외계인들 먹잇감일 지도 모른다."


역시 인터넷 여행을 통해 배운 음모론들과 기생수라는 만화의대사를 조립해 얘기를 했다. 만화를 볼 때 충격적이라고 생각했던 대사였다. 그 말을 외워 뱉는 내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으... 맞다. 그런 시기가 온다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지.."


나는 분명 J가 우리가 같이 읽었던 베르세르크의 대사를 인용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같은 대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는 당연히 '가츠'같은 대사를 했겠다. 하고 생각했다. 


J는 격투기 중국 선수권 대회에 매진했다. 나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기숙사 방에 찾아오는 일도 없어졌다. 가끔 현주에게서 J와 같이 있느냐는 문자가 오곤 했지만 나는 어학원 친구들이랑 놀고 있다거나 PC 방에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금방 단절되었다. 나는 이제 친구의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나와 석연치 않은 비밀을 갖은 현주가 두려웠다. J는 격투기 때문에 현주와도 연락이 뜸해졌고 자주 다투었다. 


"대업을 이루는데 처자는 의복과 같은 것이지"


언젠가 전국시대 만화책을 보던 내가 J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쟁이 나면 내 가장 약점은 처, 자식, 가족이다. 적들이 가장 크게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그런 점이지. 진정한 강자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난 내 약점이 기술을 잘 못 응용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 생각해 봐 네 가족이나 여자친구가 인질로 잡혀있거나 네가 수련하는데 자꾸 못하게 해서 결국 니 실력이 부족해져 그러면 결국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렇구나"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이기는 거라고. 싸우기 전에 이미 승리는 예측되는 거야. 백날 군대 훈련하고 장비 좋은 미국이랑 맨날 놀다가 6.25 때 장비 갖은 이라크랑 싸우니까 이라크 바로 털렸잖아 사실 전쟁 전에 이미 승패는 난거지, 격투기라고 치면 시합장 오기 전에 쏟아부은 시간이랑 장비, 연습상대로 이미 승부 다 결정 난 거 아니냐?"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 격차는 연습과 정신력으로 극복한다."


나는 친구와 내가 본 만화와 영화들의 대사들을 가지고 재미있는 역할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J는 진짜로 자신이 걸었던 격투기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였고 현주에게 연습을 위해 매진할 것이라 통보한 듯했다. 


나는 J가 나의 이런 말들에 대해 나와 똑같이 '우리 그냥 그런 분위기 놀이를 하자'라고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훈이형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J는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내가 전 세계적인, 그리고 전인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는 중국 격투기 대회 제패를 위해 매진했다. 


사실 나는 중국 격투기 대회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1승이라고 거두면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언제 승자의 대열에 낀 적이 있었나? 우리는 항상 쫓기는 측이었고 바닥에 깔리는 측이었다. 우리에게 맛있는 것이 생기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뺏기기 전에 먹어야 했고 우리가 어디에 나가서 논다면 돈을 뺏길 각오를 해야 했고 뺏기더라도 집에 올 수 있도록 차비 정도는 정말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겨야 했다. 우리가 잠시 그 굴레를 벗어나 이제 먹잇감이 되지 않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했던 것일까? 승자의 대열에 포식자의 위치에 J는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그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J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다. 


[다음 주에 대회다.]


J의 문자가 왔다.


[오 진짜? 대회 끝나고 한잔하자]


[본선에 진출하면 또 한 달간 연습해야 한다. 그럼 너 한국 갈 때까지 못 볼 수도 있어서 미리 연락한다.]


[오... 그럼 정말 축하하지 대회 끝나면 연락 줘] 


내가 귀국을 앞두고 사랑은 잃고 어학은 늘지 않고 술만 늘어버린 나의 나날들에 대해 잊기 위해 술자리를 전 전하는 동안 며칠간 J의 예선 시합이 있었다. J는 던져졌고 맞았고 가드를 올렸고 반격을 했다. J는 숨을 고르고 상대의 기술을 예측했고 자신의 기술을 구사했다. 상대의 허점을 노렸고 자신의 허점을 노출시켰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했다. 기술에 압도당하면 체력전을 시도했고 지구력이 차이가 나면 타격으로 시합을 끝내려 했다. 


"야 또 그 사진 보냐?"


"아... 시합 복기 하고 있었다. XX 여기서 내가 기술을 들어가야 했는데 그냥 타격으로 승부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하야 그래도 3승이나 했다는 게 어디냐."


"1등이 아닌 운동선수는 의미가 없다."


"야 다시 연습해서 시합하면 되지 다 경험이 되는 거 아냐, 우리 술이나 빨러 가자."


"아... 전성기 나이가 스물 다섯 전인데 그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보니까 뭐 나이 들고도 데뷔하는 선수들도 있더구먼"


"그래 맞아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J는 훈이형과 함께 격투기 단련을 했고 가끔 연락이 오면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청춘의 부름이 오면 여기 저 기기로 달려 나가 우리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청춘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췄다. 하지만 J는 현주의 부름에 중간중간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곧 짧지만 길었던 내 중국 체류가 끝나가는 날이 다가왔다. 


[술 한잔 할래? 너 곧 돌아간다며?]


 현주의 문자였다. 


[응, 진짜 ㅋㅋ J도 같이 볼까?]


[아니 우리 헤어졌어...] 


현주는 갑자기 깜짝 놀랄 소리를 했다.  

'J도 별말 없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왜?] 


[만나서 얘기할까? 복잡해...]


예전 같으면 있던 약속이라도 제치고 나가겠지만 어쨌든 친구의 여자친구 였고 또 이제 헤어졌다면 현주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미래가 두려웠다. 그래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고 그제야 꽤 오랜 기간 친구가 돌아간다는데 연락도 안 오던 J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뭐 해? 나 이제 한국 가는데 술 한 잔 빨자”


J는 귀찮아서 집 밖에 나간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시켜 먹은 음식 포장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포장지의 말라 붙어 버린 남은 음식들이 얼마나 오래 밖에 나가지 않았는지를 말해줬다. 그리고 최근에 시킨 흔적들은 없었다. 


'밥을 안 먹었나...'라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여자친구할 헤어진 게 사실이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어… 그래 야지...”


"집구석 꼴이 이게 뭐냐?"


"한동안 현주네서 살다가 온 지 얼마 안 됐다."


"일단 나가자 얼른 씻어 꼴이 그게 뭐야"


"그러자.."


J와 술자리에서 나는 돌아갈 날들과 한국에서의 생활 어학원의 친구들과 마지막 여행얘기를 늘어놓았다.


“아, 맞다! 너 현주랑 깨졌다며?”


“응…”


“왜? 잘했다. 걔 뭐 맨날 흘리고 다니고”


“아니… 내가 좀 잘못한 게 있어서”


“네가 뭘 잘 못해”


“그냥 운동하느라 잘 만나지도 않고 운동하는 형들이랑 북경에 시합 갔다 오고 그러느라 연락도 잘 안 했어”


“아니 너한테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것도 이해를 안 해주냐? 좀 그건 심했네”


“그리고 지희랑 연락하다 걸렸다.”


“뭐? 지희랑? 지희는 뭐 연락할 수도 있지”


“아니… 좀 복잡하다. 지희한테 현주 씹다가 걸렸거든 현주가 지희 남자 친구랑도 자고 노래방 사장도 있고…. 뭐 그런 얘기하는데 뒤에서 현주 친구가 들어서…”


“그게 뭐 거짓말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야? 잘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해….”


“엉 나도 미안하다고 막 빌었다. 근데 또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나도 화가 나서 좀 막말을 많이 했다. 그랬더니…. 현주가 너무 화가 나서…. 너 요 근래 현주랑 연락한 적 있어?”


“나? 나 얼마 전에 보자고 하더니 그것 때문인가?”


J는 갑자기 말이 끊기고 나를 바라보았다. 


“만났어?”


“아니 내가 그날 어학원 일정이 있어서”


“그럼 됐어… 현주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지 마 지금 뭔가 나한테 엄청난 오해를 해서 내가 만나서 잘 풀어야 하는데….”


“아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냥 현주가 운동이 대체 뭐고 친구가 뭐고 자기는 내 인생에서 도대체 뭐냐고 하길래...."


"아 여자친구지 일단 1등이라고 근데 다른 일들이 좀 급하다고 하지?"


"응 그래야 하는데 너무 격투기에 대해 막말하고 내가 재능이 없다고 하니까... 뭐 그게 사실인가?"


J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이! 그래 네가 뭐 나이도 들고 아직 수상도 못했지만 어? 아직 어리고 격투기가 좋은 취미고 나중에 뭘 하든 다 도움이 되는 거 아냐..."


"그렇구나... 역시 재능이 없는 것인가..."


"그래서 정말 헤어진 거야?"


"응 현주도 똑같이 얘기하길래 내가 욱해서 그냥 못할 말들을 좀 한 것 같다."


"아 미안하다고 대회 입선도 못해서 너무 힘들었다고, 잘 빌어봐"


“야 우울한 얘기 하지 말고 너 이제 한국 가야 하는데 우리 신나게 놀아야지? 마지막으로 우리 상해의 빨간 그네 한번 어떻냐? 내가 쏠게”


우리는 그날 신이 나서 둘이서 엄청나게 폭음을 하고 술을 마시고 시내에 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또다시 머릿속에 울리는 젊음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 실 이만 J는 희정누나와의 관계도 그랬듯이 마치 격투기의 겨루기 시합 한판과도 같은 격렬한 구애가 끝나고 안정적인 사귀는 사이가 되자 사랑의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현주와도 사귀기 직전까지 다른 남자와 사이에서 고뇌하고 그 남자를 떼어내는 과정을 통해 J는 사랑의 감정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현주의 사랑을 쟁취하고 나자 J는 사랑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느끼지 못했고 관계에 소홀해지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주는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현주 역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사랑이 살아 있음을 증거 하고자 했다. 현주가 J와 관계를 적극적으로 정리를 하려 하자 J는 마치 격투기에서 허점을 당하고 실점을 한 선수처럼 다시 현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진 상해의 겨울은 정말이지 추웠다. 춥고 비가 항상 부슬부슬 내렸다. J와 현주와의 관계처럼 상해의 겨울 날씨는 정말이지 우울했다. 남쪽 지역이라 영하로 내려가는 일도 없고 눈도 내리지 않았지만 대신 비가 왔고 한기가 뼈까지 파고들었다. 게다가 남쪽 지방답게 온돌 난방대신 공기를 데우는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했기 때문에 집안은 항상 추운 겨울이었다. 한국의 따듯한 겨울이 그리워지는 상해의 겨울이었다. 항상 회색 하늘과 질척하게 내기는 빗물 그리고 길가에 덜 녹은 눈이 먼지와 섞인 검은 흙탕물이 상해의 겨울 풍경이었다.


언어를 배워보겠다고 중국까지 와서 생각했던 만큼의 언어 능력은 늘지 않고 여자친구에게 깔끔하게 정리당한 나의 심정 또한 우울했다. 그리고 이미 끝나버린 사랑을 디즈니와 할리우드, 여러 드라마들의 영향으로 내가 혼자 아파하고 그리워하면 그 사랑은 진실되고 내 아픔만큼 내 사랑이 진실해지고 사랑의 힘이 그녀에게 전해져 그녀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외로웠다. 상해에서 인간관계들은 송별회를 기점으로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고 한국에서의 인간관계들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항상 축제 같은 나날들이었지만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외로웠고 비가 내리는 상해의 겨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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