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헤르] 모로코 여행의 시작과 끝
탕헤르의 메디나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 혼잡하지만, 이제 메디나는 볼만큼 봐서 크게 신기하지는 않아도 수크의 번잡함과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기분은 묘해진다. 탕헤르의 메디나는 파울료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의 배경이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가기 위해 바다 건너편 스페인 땅 타리파에서 탕헤르로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던 산티아고가 자칫 현실의 안락함에 빠져 자아의 신화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머무를 뻔했던 도시가 바로 탕헤르다.
메디나를 통과해 호스텔까지 가는 길목의 카페마다 모로코 남자들이 앉아 민트차를 마시고 있다. 정갈하던 아실라와는 다른 사람 사는 흥청거림을 느끼며 호스텔로 들어간다. 아실라에 다녀와서 메디나까지 돌고 오니 피곤하다. 8인실 도미토리의 이 층 침대라도 내 공간이 있어서 편안하다. 이미 저녁때가 되어 어젯밤의 나처럼 체크인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같은 방에 짐을 푼 남자가 인사를 한다. 프랑스 사람인 피에르 아저씨는 3주의 휴가를 얻어 모로코에 도착했다고 한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해서 함께 나가기로 한다.
오늘 처음 도착한 피에르 아저씨는 모로코인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그가 메디나를 안내해 줄 거라고 한다. 보나 마나 메디나의 골목길을 안내해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일 텐데, 피에르는 아닐 거라며 따라오라고만 한다. 그 모로코인이 데려간 식당은 맛은 좋았지만 가격이 싸지는 않다.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라 남은 디람을 써버리려고 했기에 조금 거하게 먹는 것도 괜찮다. 피에르 아저씨는 대학원에 다니는 스물두 살짜리 딸이 일본 남자와 동거 중이라며 자신도 불교와 요가 같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지금은 이혼한 두 번째 부인이 모로코인이어서 그녀와의 사이에 난 아홉 살짜리 딸과 모로코에 오고 싶었지만 딸이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혼자 여행을 왔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참 소상히도 개인사를 들려주신다.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긴 시간 동안 아까 피에르의 친구라는 모로코인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나오니 반기면서 바쁘게 메디나의 골목을 돌면서 여행자들이 좋아한다는 명소들을 구경시켜준다. 유명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라며 1942년 문을 열었다는 카페 바바(Cafe baba)에도 데리고 간다.
골목의 특이한 그림, 유대인이 살던 흔적 같은 곳에 숨 쉴 틈도 없이 데리고 다니다가 결국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아르간 오일(Argan oil) 파는 가게다. 모로코가 아르간 오일로 유명해서 어디 가나 구할 수 있는 것인데 이곳은 특이하다. 진짜 연금술사라도 되는 것처럼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마술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피에르도 나도 구매를 안 하니 우리를 데려간 모로코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오일 가게에서 나오니 친구라서 가이드해준다던 모로코인이 돌변해서는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피에르가 너랑 나는 친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항변하지만 소용없다. 결국 둘 다 10 디람씩 주고 나서야 그 모로코인은 슬금슬금 사라진다. 피에르는 난감한 얼굴이다. 모로코에 처음 왔다는 그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어지러운 메디나 투어를 짧은 시간에 했으니 괜찮은 거라고 이야기하니 피에르의 얼굴이 환해진다.
자유로워진 피에르와 나는 메디나를 조금 헤매면서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고급 카펫 가게 주인은 나이 지긋한 프랑스인인 피에르가 말을 거니 좋아하는 눈치다. 워낙 비싼 물건이라 아무나 들여보내지도 않는다는 가게 문을 선뜻 열어주는 것이다. 피에르는 금방이라도 카펫을 구입할 것처럼 주인과 계속 프랑스어로 이야기 중이고 나는 직원이 가져다주는 민트티를 마시며 고급 카펫들이나 구경하고 있다. 프랑스어가 거의 공용어인 모로코에 프랑스인과 함께 있으니 편하긴 하다.
호스텔에 돌아와 보니 유럽여행 중에 모로코에 들렀다는 한국인이 체크인 중이다. 그녀는 탕헤르 항구에서 호스텔에 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면서 반쯤 넋이 나가 있다. 사실 이 호스텔은 항구에서 걸어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지리를 모르는 초행자인 데다가 유럽여행 중에 들렀다니 모로코에서 혼란에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모로코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라 너무 반갑다. 지브롤터 해협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한국사람 에스와 함께 그녀의 커다란 캐리어에 나온 컵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수많은 바다와 산과 메디나를 거쳐 이곳에 다다른 나에게는 탕헤르, 아니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밤이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모로코에 입성한 에스에게는 긴장이 엄습하는 첫 밤이다.
탕헤르에 와 있으니 자꾸 <연금술사>가 생각난다. 탕헤르에서 여행 경비를 다 잃어버리고도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며 정착했던 산티아고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 기어이 이집트로 떠난다. 탕헤르를 떠나는 일은 덕분에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직 못 찾은 - 찾았을 리 없는 - 자아의 신화를 찾아간다는 명분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합리화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