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에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낯설지 않다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새벽, 가트로 나간다. 해뜨기 전이라 어두운데도 이미 많은 사람이 가트에 나와 있다. 어제 보트를 타기로 한 람 할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일출을 보러 나온 여행자들,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도인들, 벌써 신성한 갠지스에 목욕하러 나온 힌두교도들까지, 사람은 많지만 밤의 어수선함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이 감도는 아침이다.
머리를 깎은 젊은이가 뿌자 바바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시선이 간다. 말끔한 차림의 그는 이야기를 나눈 후 옷을 벗고 갠지스에 몸을 담그고 나온다. 일련의 절차를 거치고 옷을 다시 입더니 의식을 행한다. 그는 상주다. 저 북쪽 가트에 아버지를 화장시키러 온 것이다. 여행자의 얕은 호기심은 금세 미안함으로 변한다. 여기는 바라나시다. 삶의 활기가 가득한 이 도시에서 죽음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에 타야 할 6시가 가까워오면서 다른 뱃사공들이 호객을 해온다. 어제 람 할아버지는 백 루피면 된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의 젊은 사공들은 사백 루피를 부른다. 약속을 잊은 것인지 람 할아버지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어제 부른 뱃삯이 너무 싸서 다른 가트에서 다른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람 할아버지 만나는 것은 포기하고 즉석에서 흥정을 한다.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다들 백 루피는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친다.
릭샤왈라들의 그것처럼 뱃사공들도 담합하고 있다. 탈 배는 하나인데 흥정하는 사공은 여러 명 이어서 정신이 없다. 갠지스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던 잔잔한 마음에 짜증이 일어나면서 정신이 퍼뜩 든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지만 돈 앞에선 치열한 삶이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흥정하던 일본인 여행자들과 함께 배를 타기로 하고 일인당 삼백 루피에 낙찰을 본다. 백 루피를 깎았지만 이게 싸게 타는 금액인지도 잘 모르겠다.
한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배를 탄다. 여태 흥정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우던 사공은 이제 말이 없다. 노 젓는 소리만이 강 위에 흐른다. 배는 갠지스 여기저기를 떠다니다가 북쪽 마니까르니까(Manikarnika) 가트에 근접한다. 하얀 연기와 시커먼 건물 지붕이 대조를 이룬다. 여기가 바로 화장하는 곳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신을 화장하는 하얀 연기는 이 아침에도 멈출 줄 모른다.
누구든 이곳에서는 죽음을 의식하게 된다. 삶이라는 단어와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힌두교에서는 바라나시에서 죽어서 화장을 하고 갠지스에 뿌려지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한다. 방금 전에 뱃삯 때문에 한판 실랑이를 하고 올라탄 배 위에서 바라보는 화장터의 연기가 여행자의 입을 다물게 한다.
일출을 보러 나와서 화장터를 먼저 보게 되니 더욱 숙연한 마음이다. 태양은 매일 떠오른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늙고 죽는 일은 어디든 매일 일어난다. 한국에서의 나는 보이지 않는 생로병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바쁘게 떠밀려 가기만 했다. 바라나시에서는 눈길이 가는 곳에 그것들이 실체로 펼쳐 있으니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배는 강 동쪽 건너편에도 잠시 정박한다. 아예 배 한 척을 대여한 가족이 성스런 목욕 중이다. 남자들은 옷을 다 벗고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성수에 몸을 담근다. 추위를 무릅쓰고 갠지스에 들어가 영혼을 정화하는 것, 생생하게 살아있음은 이런 것 아닐까? 죄가 사해지는데 추위가 무슨 걱정이 될 수 있을까? 아예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죽은 자의 뼛가루가 뿌려지는 신성한 강물에 산 사람은 몸을 담근다.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
드디어 해가 떠오른다. 처음 인도에 와서 갠지스의 일출을 봤을 때는 벅찬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담담하게 해를 마주하고 있다. 6년 전 여행에서 이미 봤던 광경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평온한 이 마음은 세월의 선물인 것 같다. 살아낸 시간만큼의 나이테가 내게도 생겼을 것이다. 일상을 떠나오니, 날마다 뜨는 해와 달과 별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갠지스의 일출을 보고 나서 숙소에 들렀다 다시 가트로 나온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닌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에 들어가 인도식 아침을 먹는다. 입맛에 그럭저럭 맞는 여행자 식당 메뉴는 백 루피 내외의 가격인데 비해 여기는 25루피다. 싸고 조촐한 음식이지만 아침으로 손색없는 한 끼다. 가트 바깥쪽 길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매일 과일을 예쁘게 쌓고 채소를 준비한다. 다 팔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좌판의 주인 할아버지에게도 손님들이 있다. 소소한 일상이 깨어나고 있는 아침이다.
해가 뜨면서 추위가 사라진다. 가트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자 디아(꽃불)를 팔던 여자는 바구니를 놓고 갠지스를 바라보고 앉아있다. 아침 장사가 끝났으니 느긋하게 저녁 장사를 걱정하는 것일까? 편안한 얼굴의 그녀는 내 카메라를 응시한다. 해가 내리쬐는 가트 계단에서는 하얀 수염의 사두가 빨래를 말리며 갠지스를 바라본다. 바쁠 것 없이 다들 느긋한 얼굴이다.
골목길을 따라 걷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재미있다. 호객하는 사람들이나 빤히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들도 즐기며 걷는다. 좋아하는 라시도 한잔 마시고 군것질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이국의 골목길을 걷는다. 자이살메르에 낙타 사파리 하러 갔던 일이나 여기 바라나시로 오기 위해 고생한 일들은 이미 아득하다. 지금 바라나시에 있는 것이 당연한 듯 편하게 느껴지는 나른한 시간들이 내 것이다. 방향은 북쪽으로 잡았지만 무엇에 취한 사람처럼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맨다.
"람 람 사뜨 헤! 람 람 사뜨 헤!"
합창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뭔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추어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오고 있다. 기다란 널판에 반짝이는 주황색 천을 씌운 무엇을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맨발로 간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골목이라 잠시 서서 행렬을 먼저 보낸다.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그 주황색 천을 덮은 널빤지가 바로 눈앞에서 사라진다. '람 람 사뜨 헤'는 '신의 이름은 진리다'라는 뜻으로 시신을 옮길 때 합창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운구행렬이다. 시신을 천으로 덮어 널빤지 위에 올려 매고 화장터인 마니까르니까 가트로 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주검이 내 옆을 지나가고 있다.
삶을 마감하고 이젠 필요 없는 육체를 화장해서 갠지스에 뿌리고 영혼을 구원하러 온 어떤 사람의 일생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삶을 마감한다.'는 말이나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을 쓰면서도 그 문장의 무게가 가슴에 내려앉는다.
북쪽 가트에 가까이 갈수록 이런 행렬을 자주 만난다. 노인은 주황색, 어린이는 흰색, 여자는 붉은색으로 시신을 감싼다고 한다. 언제나 해가 뜨거나 날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사람이 죽는다. 바라나시에서는 삶이 현실인 것처럼 죽음 또한 그렇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발걸음은 가트의 화장터에 닿는다. 단백질이 타는 야릇한 냄새와 흰 연기가 끊이지 않는 풍경 앞에서 일순간 심난해지고 숙연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동트기 전 배 위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훨씬 직접적인 확인인 셈이다. 저쪽에서 쳐다보던 노인이 다가온다. 허름한 노인의 말은 딱 설명을 할 만큼만 숙련된 영어였다. 대대로 그곳을 지키는 카스트라고 자신을 설명하며 원하면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시신 한 구를 화장하는 데 한 시간 걸린다. 많게는 200구의 시신들이 화장되기 위해 이곳으로 매일 온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부인이 죽으면 남편이 머리를 깎고 상주가 된다. 수천 년 간 꺼지지 않고 타오른 불꽃의 불씨를 상주가 가져다 장작 위에 불을 붙이면 화장이 시작된다. 화장하는 동안 유족들은 울지 않는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중에 화장이 끝나고 집에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소리 내어 운다. 높은 계급은 높은 곳에서, 낮은 카스트는 낮은 곳에서 화장된다. 부자들은 넉넉한 땔감을 사서 몸을 온전히 태울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마저도 부족해서 타다 말기도 한다. 또, 바라나시에 오는 모든 시신이 화장되는 것은 아니다. 12살 이하의 어린이나 임신한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돌덩이를 매어 강에 던진다.”
특유의 가래 끓는 목소리로 천천히 힘들여 말하는 노인의 눈동자가 퀭하다. 그의 굽은 등과 목소리, 화장터의 연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범벅이 되어 마치 여기는 이 세상이 아닌 듯 혼미해진다. 마치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온 것 같다.
설명을 마치자 노인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이 넉넉한 목재를 살 돈을 자신에게 기부하라고 한다. 유익한 설명이라 생각해서 50루피를 꺼냈더니 빅머니를 달라고 한다. 기부는 기부일 뿐인데 액수를 세는 제스처에 기분이 상한다. 진짜 자원봉사자가 아니어도 설명은 잘 들었으니 기부가 아니라 이 노인에게 수고비를 준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백 루피를 주고 뒤돌아서는데, 노인은 빅머니를 더 달라며 아예 옷깃을 잡아당길 태세다. 혼미하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여기는 인도다. 그제야 손사래를 치며 그곳을 빠져나온다.
골목의 가게에 한눈을 팔며 다시 가트로 돌아온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기는 다시 삶의 현장이다.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 옆에 앉아 '강가'라고 그들이 부르는 갠지스를 바라본다. 바로 전 보고 들은 죽음은 머릿속에 어지러이 널려 있고, 지금 눈 앞에는 삶이 이렇게 옹기종기 펼쳐져 있다. 이렇게 보내는 하루와 한국에서의 하루가 같은 건지 다른 건지도 모호해진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얼마나 다른 지도 모르겠다.
가트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오후에 다시 한 번 강변의 가트를 걸어 다시 화장터로 향한다. 아까 내려다보던 화장터가 아니라 아침에 배에서 보던 방향으로 간다. 타는 냄새를 동반한 연기는 아침이든 저녁이든 여전하다. 아까는 화장터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봤고 지금은 더 근접해 올려다보고 있다. 유족들이 숙연히 서서 화장되는 장면을 쳐다본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도 나처럼 그저 쳐다보고 있다. 아까 그 노인이 내게 해주던 이야기를 어떤 젊은 인도인이 다른 여행자에게 하고 있다. 그 여행자는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아까 나의 표정이 저랬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설명을 해주겠다고 다가왔지만 이번에는 거절한다.
주황색 천을 덮은 시신이 장작 위에서 타고 있다. 화장되어 갠지스에 뿌려짐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윤회를 벗어나는 축복을 받는다 해도 가족들은 슬플 것이다. 울어서는 안 되는 유족들이 슬픔을 참아내며 묵묵히 지켜본다. 한 사람이 죽고 남은 사람들은 의식을 치르고 있다. 자욱한 연기는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난다. 연기 사이로 소들이 앉아서 하품을 한다. 개들도 어슬렁거린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고기를 굽고 있는데 여기 바라나시에서는 사람이 장작 위에서 불타고 있고 소와 개가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진다. 이 풍경이 바라나시를 잊지 못하게 할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이면에 존재한다. 나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면 죽음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여기 바라나시는 충격적이다. 골목에서 수차례 마주치는 운구행렬, 쉴 새 없이 타는 장작 위의 시신, 그 냄새와 연기들이 그대로 눈에 보이고 여과 없이 폐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죽음을 숨겨둔 세상에서 온 사람들은 바라나시에서 길을 잃는다. 남의 죽음은 자연의 현상인 듯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죽음은 두렵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느닷없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난처한 경험이다. 그렇게 당황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자리 잡아 현재의 삶을 헤아리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이끌던 "죽음"은 매일 기억하고 싶은 단어는 아니다. 바라나시에서 화장터를 기웃거리는 것은 어쩌면 이 하루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라나시 어딘가에 있어도 북쪽 화장터의 흰 연기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속죄와 구원의 강 갠지스는 잠시 스치는 여행자에게도 화두를 던진다.
죽음을 기억하라.
바라나시에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낯설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