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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Jun 25. 2019

한 계절을 보내며

어느덧 6월을 끝으로 곧 여름이 시작된다.





더욱 짧게만 느껴지는 6월, 한 달이 아쉬운 건 너무 많은 걸 한 번에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일까. 휴가를 보내고 난 후 너무도 정신없이 마지막 주에 들어서니 어느덧 여름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봄도 아직 정리를 못했는데 벌써 여름이라니.

이렇게 난 또 헛되이 한 계절을 보냈다.



박영준 질문술사님의 질문디자인연구소의 지난 봄을 돌아보다


휴가를 다녀오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지난 봄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타지에서 진행하는 미니 워크숍이라는 로망을 갖고, 피렌체에서 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곳에 가니


손 끝에 닿는, 눈동자에 스며드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받아들이기에도 벅찰 만큼 

광대한 역사의 흐름과 수많은 인파, 르네상스의 화려함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시차 적응도 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에 남아있는 봄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이런 노파심에

서둘러 펜을 들었고 미리 적어둔 3가지의 기억과 선별한 7개의 추억을 더 적어 넣었다.


"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따스함, 주어진 관계의 고마움을 얻었다. "

 그래, 무엇보다도 지난봄, 아니─ 상반기는 내게 큰 배움의 시간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내 삶에서 배움을 받아들이고, 변하는지에 대한 시도였다. 

여태 배운 것을 시도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해 왔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 이것은 인간과 관계 대한 이해. "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혼자서 모든 걸 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었기에 이 양어깨에(승모근이 두터워질 만큼의) 많은 짐을 올리고,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으며 아틀라스처럼 홀로 짊어지려고 했다.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했고, 맡길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이 어느덧 나의 부정적인 인간관을 만들어갔고, 나는 철저하게 고립된 걸까. 이유는 모르겠다. 

나에게 신뢰란 힘든 것이며, 불가능하고, 관계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신뢰에는 경험이 필요하다-라는 퍼실리테이터의 말에 나는 많은 이들이 내미는 신뢰의 손길을

스스로 뿌리치진 않았는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변해가고, 그런 경험들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가 옳고, 판단하려 한다는 어느 큰 스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처럼 이젠 감히 내가 무언가를 판단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겸손하게 히말라야를 걸었다 생각했지만

그 누구보다 오만했다. 


내가 I'm Great라고.

You're not, I wasn't라고 외치며 겸손의 마음으로 걸어야 하는 곳을 비교와 오만으로 걸었다.

알지만, 알고 싶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을 

조금씩 내 안에 스며들게 하는 그런 봄을 보냈다. 





"마땅히 지금 해야 하는 것들을 미뤄두고 후회하는 '막연한 게으름'"


이번 봄을 보내며 무척이나 아쉬운, 후회하는 것은 '지금'해야 할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미뤄둔 것이다.

난 방송대 4학년생이다. 그러나 성적표에 꽂힌 총(F)을 보면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해 시험을 치는지, 학위를 따기 위해 시험을 치는지

그 취지와 의도가 모두 퇴색되어 버렸다. 


물론, 하루에 한 시간(아침이나 저녁이나 점심이나) 인강을 듣고 책을 보는 게 한 두시 간이면 되는 건데

스마트폰 한 시간 보는 건 매우 잘하면서 펜 들고 인강 보는 건 왜 이리지 되질 않는 거지. 

출석 수업을 가면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데 영상을 보는 순간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계사와 신화는 좋아하는 과목인데도 교과서를 보는 순간 다시 책을 덮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신화는 이윤기 선생님 책으로 공부하고 세계사는 요약본만 훑어봤다.

(대체 난 교과서를 왜 구매한 것인가.)

물론, 공부는 매우 재미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배움을 느낄 때마다 즐거움이 커진다.

그게 내 자발적인 선택에서 오는 것일 경우, 배움을 얻을 수 있고, 물을 곳이 있을 때는 더더욱.

하지만 스스로 스케줄을 짜고, 공부하는 것이 여간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것도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인가)

말이 4학년이지 내년에도 유급이라 계속 다녀야 하는 날 주변에서 매우 안타깝게 보지만

그래도 휴가 다녀오자마자 시험 치고, 그다음 주에도 여러 행사들을 소화하고 벼락치기든 뭐든 해서 

시험을 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뭐, 나쁘지 않아)

그리고 이번엔 좀 풀었으니 총은 안 맞겠지(제발)




─봄부터 꽃을 시작하고 나서 내겐 삶의 행복이 더해졌다. 


여름학기는 여러 일정과 행사가 겹쳐서 빠져야 하는 날도 많고, 날이 덥다 보니 꽃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멋진 후원자(?)가 나타나는 덕에 계속할 수 있었다.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화병 꽂이를 하고, 오랜만에 집에 꽃이 있으니 분위기가 한결 화사해졌다. 꽃은 자체만으로도 행복하지만, 다루는 과정에서 내게 오는 것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되는 것도 함께 배우게 된다.

 

선생님은 종종 식물 심기도 함께 병행하시는데, 나는 꽃을 다루는 것도 좋지만

테라리움이나 식물 심기가 어쩐지 더 행복해진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오래가고, 꽃이 사그라져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서일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뿌리나 줄기가 다칠까 봐 조심조심 다루면서 식물들과 교감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법정스님이 무소유에서 화분도 다 손이 가고 애가 가는 거라 하셨지만, (틀린 말이 절대 아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 배려하며, 

칼 세이건의 말처럼 나 자체가 지구에서 태어난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목금- 출장 교육, 토요일- 친구 자녀 돌잔치 행사 사회,

일요일 하루 종일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물론 이번 주에도 할 일이 많고, 교육은 더 많아졌고.

스페인어 수업과 한국 문학 수업이 8월부터 날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마음에 한적한 길이 하나 생긴 기분이다.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쓰진 않고, 차곡차곡 모아 놓을 생각이지만 

꼭 무언가를 해야만 그 시간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자체를 내가 느끼고 있다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니어도, 슬픔이어도, 기쁨이어도, 분노여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지금이 아닌 미래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도록 애쓰는 것.


지금의 사람과 지금을 사는 것


─ 그것이 이번 여름의 나의 숙제.



사 계절 중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계절들 뿐이고

변화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에 태어난 것은 특별히 주어진 행운이자 행복이다. 


여름은, 여름이기에 더욱 뜨겁게 우리를 움직이게 해 주는 힘이 있다.


나는 지금 여름의 문 앞에 서 있다.

다가올 지금의 여름을 더더욱 사랑하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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