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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Oct 05. 2020

제가 생각하는 명절이 뭐가 어때서요?

결혼 전후, 너무 다른 추석

  시아버님의 차례상은 낯설었다. 코 끝에 닿는 향내음이 뿌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25년 만의 차례. 늘 방랑자같이 명절을 보내던 내게, 결혼 후 맞이하는 차례상은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낯설었다.



 명절 전날 큰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큰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했고, 아빠는 밤을 그렇게 까고 계셨다. 시골에 마땅히 놀만 한 게 없었던 나는 동생과 함께 큰집 앞 바닷가에서 빈 배를 오르거나 폭죽을 터트리며 놀았다. 명절 당일 눈을 뜨면 아빠는 새벽같이 일어나 계셨다. 어른들이 차례를 지내고 나면 우리는 서둘러 외할머니댁으로 갔던 게 어린 시절의 내 명절 루틴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이 흩어지고 친척과 왕래가 끊기면서 내게 명절 루틴이 사라졌다. 가끔 부모님을 뵙거나 고향 친구를 만나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기에 좋은 조금 긴 연휴였다. 회사에서 연차가 조금 쌓이고 난 후에는 추석 연휴에 휴가를 붙여 히말라야를 다녀오는 재미가 들렸다. 모일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가족끼리 만나고 싶을 땐 펜션을 잡아서 모였다. 추석은 내게 히말라야 트레킹 하기에 아주 좋은 황금연휴 찬스 또는 가족 여행 시기였다.


17년도, 추석 황금연휴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낸 EBC 트레킹



 사실 올 추석도 코로나가 터지지 않았다면 만사 제쳐두고 미련이 남은 고쿄리와 촐라패스를 찍고 올 예정이었다. 내게 정해진 추석 루틴은 없었다. 매년 다르게 만들어가는 추석 DIY, 자유롭고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건 싱글일 때나 가능한 말이었나 보다. 남편은 아버지 제사를 꾸준히 지내왔고, 심지어 할머니 댁에 매번 인사를 드리러 가는 명절 루틴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루틴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결혼 후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추석은 시작도 전에 많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줬다.

 요리 못하는 사람의 대명사인 내가 맏며느리로서 해야 할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할 거라는 스트레스, 불편한 마음을 안고 여기저기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 스트레스, 그리고 각종 선물과 용돈으로 나가는 많은 지출, 친척들의 흔한 어디가 집값이 올랐더라, 누가 어디 학교 갔더라, 애는 안 낳니? 같은 끔찍한 대화의 시간.


 온전히 내게만 시간을 쏟던 에너지와 노력을 외부로 쏟아야 하다니!


 앞으로 맞아야 하는 추석이 내가 여태 보내온 나만의 추석을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재며 불만을 억누르던 어느 날, 명절에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이야기를 하다 친정과 크게 다퉜다. 엄마는 어른이기에 인사를 가야 한다 했지만, 난 예의 이전에 여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할머니께 왜 내가 결혼했단 이유만으로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내 가치관과는 달랐다. 결혼했다는 이 과거형의 동사가 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날 예의 없는 딸로 여기고 속앓이를 하셨겠지만, 할머니께 좋은 감정도 기억도 없는 내가 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명절 때 앞으로 히말라야를 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죽겠는데, 내키지 않는 자리에 앉아 부동산 이야기나 듣고 하하호호 억지로 웃어야 하다니!

 

 왜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내 명절의 기준을 맞추고 고쳐야 해?
내 명절만 이상한 거야?

 명절이 놀러나 다니는 날이라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고 소중한 날이다. 그러나 내 명절의 가치관이 바뀌게 된 많은 시간들. 혼자 지내야만 했던 낯선 명절. 그 시간을 어떻게든 외로움과 발버둥 치며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온 모든 과정들이 마치 무시받고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도 속상했다.

 남들이 보기엔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홀로 먼 오지로 여행을 떠나거나, 아예 집에 콕 박혀 나오질 않는 내가 보내는 명절이 이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왜 나쁜가, 왜 틀린가. 나는 그 속에서 충만한 행복을 느끼고, 사람들과 관계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성장해왔다.  


  왜 명절은 항상 같은 모습이어야만 할까.


 누구에게나 매해 보내고 싶은 명절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차례를 지낼 때도 있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좋은 추억을 쌓아도 좋고, 오랜만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고구마와 새우를 튀기며 낄낄대거나, 또는 개인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매년 다채로운 추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김서방과 장인어른, 이런 좋은 추억들로 채우고 싶다.




 내게 명절은 그렇다.

 좀 더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지내는 시간, 성장한 자신을 만나는 시간, 먼 훗날 오늘을 돌이켜봤을 때 가슴 한편이 흐뭇해지는 추억을 쌓는 시간. 그래서 나와 당신의 추억이 다채로워지는 그런 삶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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