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비아 킴 Oct 09. 2018

내가 제일 마지막에 죽으려는 이유




 얼마 살지 않은 삼십 대 초반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분명 다들 웃을 것이다. 나는 원치 않은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았지만, 죽음을 원했던 시절ㅡ 그것은 나를 슬프게 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요, 나를 괴롭게 하는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나는 총 세 번의 유서를 썼는데, 가장 처음 쓴 유서가 서른이 되기 전 홀로 히말라야 여행을 앞둔 가을 초입이었다.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의 일이 생긴다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리하지 못한 부채, 얼마 되지 않은 물건들, 인수인계하지 않은 업무 등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될 게 분명했기에 걱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마음에 걸려 유서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고양이 한 마리 때문이었다. 어쩌다 데려온 것이 어느덧 7여 년, 주인을 닮아가는 것인지 성격도 고약하고, 겁이 많아 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을 붙이지도 않았고 다루기도 힘들었다. 젊지도 순하지도 않은 이 녀석이 내 손을 타는 나머지, 기꺼이 거둬줄 곳이 없어 보였다. 나를 닮아 누구와도 섞이지 못해, 더욱 마음이 쓰이는 작은 고양이를 키우는 법과, 부탁하는 내용을 종이 두장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이 행복했으면 한다는 짧은 줄을 덧붙였다. 가족들은 극성이라 생각하면서도 내심 섭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사히 돌아왔으니 첫 번째 유서는 무효가 되었다.


 두 번째 유서는 사랑니 발치를 할 때였다.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잔뜩 겁을 먹고 유서를 쓰면서도 고양이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한가득이었다. 그때, 나도 고양이도 나이를 더 먹었으니 챙길 것이 더 많았다. 세 번째 유서인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갈 때도 다를 바 없었다.



 홀로 제 몸 건사하지 못하는 늙은 고양이가 혼자 남아버리니 서둘러 죽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늙은 고양이를 맡아줄 이도 없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은 대체 누가 거두어 준단 말인가. 나와 삶을 함께 해 준 이 작은 생명체는 나에게 살아있는 동안 돌봐줘야 할 책임뿐만 아니라, 떠나가는 길마저도 배웅해야 하는 책임을 함께 준다. 또한, 그것에서 머물지 않고 나의 모든 관계로 확장되도록 만든다.

ㅡ내가 먼저 떠난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 곁은 누가 지키고, 슬퍼하고, 추억을 기리며 울어줄 것인가?


 죽음에 순서는 없다지만, 만약 정할 수 있다면 나의 죽음은 가장 마지막이고 싶다.

 여전히 상실의 슬픔과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홀로 맞는 죽음이 외롭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준 사랑에 대한 보답이자, 그들을 향한 나의 사랑법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 친구는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강해졌단다.

 그럴리가.

 단지, 나이를 먹어 쓸데없는 걱정이 늘어난 것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의 결혼식에 가면 난 늘 눈물이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