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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May 06. 2019

성채여, 인간의 마음속에 너를 세울 것이다

생텍쥐페리 <성채>


성채여, 인간의 마음속에 너를 세울 것이다.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 성채 >


 고등학교 시절 생텍쥐페리의 <성채>는 내게 새로운 문장이었다. 어린 왕자와는 다른 건조한 말투. 세상과 단절한 듯한 왕, 모두의 위에 서 있는 왕, 한없이 고독한 경지에 오른 왕의 모습은 외로움을 채우려 사랑을 찾아 나선 어린 왕자가 자란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나의 외로움은 하찮아졌다. 그를 닮는다면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좀 더 멋들어져 보일 거라 생각했다.

 의미도 모른 채 멋들어진 문장을 외우고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처럼 새기곤 했다. 그럴수록 나도 세상의 고독을 끌어안은 황량한 사막의 왕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국민 없는 왕을 흉내 내며 나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고독'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여전히 외로웠다.


 분명 나는 내 세계의 왕이다. 실존하는 국가의 개념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그리고 눈을 감는 그 순간 나의 세계는 태어나고 존재했다. 그리고 소멸해 간다. 그 세계라 함은 신체를 키워나가고, 물질로 몸을 뒤덮으며 그리고 상대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쇠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관조하고, 질문하는 것에서 세계는 점점 구현되어 간다. 그리고 '구현된 나'는 쉽사리 형체를 잃고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나는 여태 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 왔을까.

 그 세계는 철저히 상대적 개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비교와 시기로 가득 찼고, 열등감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나는 내 위대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전쟁 같은 경쟁을 서슴지 않았으며, 경쟁자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하고 불안해했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면서 계속 학업을 이어나가는 친구들을 시기하며 지고 싶지 않아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보다 더 나은 이들을 쫓아가기 위해 서울까지 강연을 들으러 왔다. 누군가 무엇을 사면 나도 사야 했고, 여행을 가면 나도 가야 했다. 내가 빛을 받아야 했고, 남들보단 뒤쳐지는 걸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 선택의 모든 것은 철저히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들이었다. 성공하려 했으나 성공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행복하려 했으나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 쫓아가며 현재를 보지 못했고, 과거를 돌이켜 보지 않았다. 나는 왕이었으나 온전한 왕이 아니었다. 내 세계는 있었으나, 나의 세계는 아니었다. 타인의 기준과 나의 허영이 만든 허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상의 세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홀로 가시로 만든 왕좌를 만들고 그곳에 앉아 자신이 만든 왕관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애쓰는 외로운 인간이 보였다.

 

 이것이 정말 내가 바라던 ‘나'인가.

 순수하게 별을 보고 즐거워하며, 책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작은 미물 하나에도 기뻐하던 '아이'는 간데없고 스스로를 해친 내가 정말 '나'인가.  

  

사람들은 개나 닭이 도망가면 찾으려 하나
자기의 마음은 찾으려 하지 않는다.
학문, 즉 배움의 도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맹자 <구방심>

 

 성채의 의미를 알게 해 준 것은 오래된 성인이 남겨준 한 마디였다. 내 마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들여다볼 것. 내 마음은 약하고, 쉽게 부서진다. 외부의 유혹과 비교에 흔들리고, 작아지며, 상처 입는다. 내부에도 적을 만들고 사방으로 이어지는 공격을 버텨 내야만 한다.

 마음을 찾기 위해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도 나는 내 마음을 수십 번 잃어버렸다. 고소에 대한 공포가 올 때마다, 눈보라에 갇혀 우왕좌왕할 때마다, 빙하가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면서 가장 보기 싫은 나를 수십 번 만났다. 그때마다 잃어버린 내 마음을 되찾아오고 지킬 수 있었던 건 함께 한 가이드의 "넌 할 수 있어! 힘내!"라는 말, 정다운 네팔 이웃들이 건네는 따뜻한 밥상, 고향과 닮은 실바람, 엄마가 좋아하던 코스모스였다.

 

 나는 더 이상 허영과 비교할 수 있는 특별함으로 성채를 짓는 것을 그만뒀다. 무너지지 않는 성채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 진심으로 나를 격려하는 친구들, 히말라야 산자락 속에서 얻게 된 엉성한 털장갑에서 전해진 온기,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작은 반려묘, 산책길에 숨어있는 푸른 닭의 장풀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빗속에서도 춤추며 달리던 즐거움, 비 온 후 맞는 따스한 햇살에 대한 기쁨, 여름날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전해주는 환희, 풀벌레의 노랫소리, 밤하늘 이야기를 전해온 무수히 많은 별들에 대한 경이로움들이 내 마음의 성채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내 성채는 부서진다. 그리고 매일매일 다시 쌓아 올려진다.

 지천에 널린 경이로움과 기쁨, 감사를 품고서.


 처음 책을 펼치던 그날부터 내 생의 절반이 지났다. 이제 겨우 고독한 왕의 독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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