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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r 19. 2019

사랑 여행기 [채비 편] 복선

[말레이시아] 그녀를 만나기 하루 전, 내 친구 파비앙의 이야기

 "그가 가진 단점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만 기억할 뿐 그런 것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사람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저녁 무렵 내 친구 파비앙과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500ml 맥주를 여섯 병 사서 숙소로 들어갔다. 호스텔은 야외 계단으로 각층이 이어지는 독특한 4층짜리 호스텔이었고, 각 층마다 널찍한 테라스와 앉을자리들이 있었다. 우리는 3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지대에서 쿠알라룸푸르의 얼굴 중 한 부분이 내려다보인다. 초록색 녹음과 검은 도로들이 뒤엉킨 쿠알라룸푸르의 뺨. 저 멀리 우뚝 솟은 쿠알라룸푸르의 오똑한 코,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 나는 쿠알라룸푸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얼굴이라도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이 터무니없이 다를 수 있고, 뒤돌면 색다른 반대편 얼굴이 보일 것이다. 거대한 숲 속에 솜씨 좋게 지어진 도시.

 파비앙과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한동안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각자가 본 모습도, 각자가 기억할 모습도 전혀 달랐을 게 분명하다.

 수년이 지났어도 선명한, 그때 내가 본 도시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다. 그가 나와 같은 도시를 떠올린다면,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우리는 맥주병을 기울이며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밤을 즐기고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할 수록 할 얘기가 끝이 없었다. 그동안 얘기할 시간이 차고 넘쳤는데 왜 우린 입을 다물고 시간을 허비했을까? 어떤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땐 결코 하지 않다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때를 맞이하면 심장에서부터 피가 끓는다. 

 한 시간도 안 돼 사온 맥주를 다 마시고, 쿠알라룸푸르의 번화가를 향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별의 언덕이란 뜻의 화려한 번화가 부킷 빈탕. 그곳에 있는 음식점의 천국, 먹자골목 잘란 알로.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파비앙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우린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난 그저 내 생활을 하고 있고, 거기에 연애 관계가 따라오고 있을 뿐이에요. 아직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게 더 중요해요.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녀의 사랑을 받을 만한 남자가 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내가 머뭇거렸다.

 "그 생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커지면 위험해요."

 "어떤 면에서?"

 "그 부분이 상실되었을 때 채울 수가 없게 되니까요." 파비앙이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소유의 사실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것을 원하냐는 겁니다."

 "우린 이제 시작하는 연인이고,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건 당연하죠. 누가 일부러 못 하려고 노력하겠어요."

 나는 갑자기 그가 젠체하는 프랑스인처럼 느껴져 불쾌해졌다. 

 "그러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요, 당연히. 하지만 후회는 끝이 없어요. 다시 돌아가면 절대 안 할 짓들만 하고 다녔지요."


 "젊었을 때 고향 근처 도시에 살 때 무렵이지요. 내가 딱 당신 나이 정도였을 때였네요. 그때 나는 프랑스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도시에 살면서 서점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8년이 넘게 일을 했다니…….

  어느 날부터 자주 서점에 책을 보러 오던 여자가 있었어요. 나는 그녀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고 우린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어요. 그런 멋진 식당이 있는지 처음 알았지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늘 곁에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예요."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그녀가 일어나 한 잔 더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어요. 나는 그럴 수만 있다면 물이든 산이든 넘어가겠다고 말했지요. 그녀는 저한테 고맙다고 말했고, 멋진 저녁 식사와 그런 시간을 제안한 저를 칭찬했어요. 우리는 잠시 걸으며 잡담을 나눈 후 다음 목적지로 갔어요. 저녁은 끝난 거지요. 날은 깊었고 이미 한밤 중이었어요." 

 "지금도 그녀와 걸었던 그 거리가 생생해요. 정확히 말하면 그 거리를 걷던 그녀가 생생하죠. 우린 공원을 지나 그녀의 아파트가 있는 건물에 이르러 현관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어요. 그녀와 7년간 함께 지낸 그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밤이었지요."    

 내 친구 파비앙은 말을 멈추고 멍하니 둘러보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왁자지껄한 먹자골목의 소음 속에서 내가 물었다. 

 내 친구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Very far, far away from here."

 솔직하지 못한 내 친구 파비앙. 우리는 6개월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때가 돼서야 그는 나에게 이후의 얘기를 들려줄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제야 그에게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으로 느껴졌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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