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only living boy Mar 16. 2019

사랑 여행기 [채비 편]
언제든 떠날 준비

[말레이시아] 그녀를 만나기 이틀 전

 "무슨 일에 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일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 폴 오스터 -


 회색 면바지와 회색 티셔츠를 입고 검은색 슬리퍼를 신은 내 친구 파비앙이 테라스에서 내 옆에 서있었다. 우리는 함께 해가 지는 말레이시아의 작은 해변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의 이름은 채라팅이었다. 

 맑은 공기의 저녁,  붉은 하늘과 바다, 저 멀리 보이는 밝은 전등을 단 어선. 땅거미가 내리는 2월 저녁의 희미한 빛 속에서 모래사장이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속으로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5일간 묵었던 숙소의 인심 좋은 여주인은 마지막 날 저녁 식사까지 챙겨주었다. 채소와 고기가 골고루 섞인 근사한 저녁. 무감각하게 주방을 들락날락 거리는 그을린 얼굴의 작은 남자들. 끝없는 얘기로 밤을 보낸 우리는 자정 무렵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난데없이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무리. 말레이인 두 명이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그들의 하얀 이가 반짝이더니 다시 사라졌다. 


 우리는 차량 통행이 전혀 없는 도로 옆 버려진 정류장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자정에 출발한다는 버스표를 구매하긴 했지만 도저히 그곳에 버스가 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가로등이 우리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불빛이었다. 내 친구 피비앙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철테 안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지만 긴 꼬리의 눈은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나는 그가 손을 문지르며 천천히 안경을 고쳐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보다시피 벌써 열두 시 반이 훨씬 지났는데, 신중하게 생각해봤을 때, 우리는 마을로 돌아가야 될 것 같아요. 여기에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버스가 온다는 건 믿기지가 않네요. 지금 이 밤공기는 나쁘지 않지만, 여긴 벌레가 많아서 자기엔 좋지 않아요." 

 낮으면서도 빈정거리는 듯한 그의 말소리가 살아난다. 

 "지금 돌아가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여기서 밤을 지새울 건가요?"

 "여긴 말레이시아고 버스가 늦는 것뿐이에요." 나는 그 프랑스 남자의 걱정스런 음색과 탓하는 듯한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나 말했다.

 "버스는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류장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팔 굽혀 펴기를 했다. 그 예민한 프랑스인 친구는 안경을 꼈다 뺐다 하면서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마침내 저 멀리서 느닷없이 불빛이 번쩍였고 버스가 우리 곁에 멈췄다. 버스 앞 유리창에 크게 적혀 있는 [Kuala Lumpur]. 버스 안은 잠에 든 승객들로 가득했다. 비좁지만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동남아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리핑 버스다. 내 친구 파비앙은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쿠알라룸푸르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시간이 오래 걸렸으면 좋겠네요. 정말 달콤한 잠에 들 것 같군요......"  하고 그는 기분 좋게 말했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버스는 쿠알라룸푸르에 당도했다. 비몽사몽간에 버스에서 내리자 말레이시아의 수도가 분명하게 서 있었다.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도시. 느긋한 토착민의 피를 가진 말레이인들은 피부가 검고 가벼우며, 민첩한 이주자의 피를 가진 중국계 말레이인들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싹싹하고 억세다. 지역의 색은 곧 그곳에 밀집된 사람들의 특색이다. 토착 말레이인들이 밀집된 곳에는 삶의 숨결인 미소를 포착하여 여유로운 공기가 감돈다. 중국인들의 세련된 공간은 수많은 영혼이 한데 모여 웃음과 울음을 터뜨리는 광장이다. 골목골목 붉은 등이 밝혀진 차이나 타운의 꺼지지 않는 활기는 한번 사는 이 삶에 화려함이란 열정을 불어넣을 의지를 북돋아 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 나라를 뜨거운 횃불처럼 타오르게 만든다. 적도의 뜨거운 날씨도, 천국 같은 에메랄드 빛 바닷물도 끝끝내 이곳 사람들을 아편 같은 나태함으로 유혹하지 못했다. 멀리서 보기엔 한없이 여유로워 보여도 그들은 실상 아주 열심히 일상을 살고 있다. 


 동트는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가로질러 인도인들의 밀집 거주지로 향했다. 인디언 타운에 있는 호스텔은 보통 아주 싼 가격에, 좋은 위치, 강의 진흙과 개똥에 둘러싸인 지저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무언가 썩은 것 같은 냄새가 올라와 주위를 감돈다. 어딜 가도 떨어지지 않는 마살라의 향내도 있다. 하룻밤에 채 20링깃도 하지 않는 가격. 만 원 돈도 되지 않는 가격이고, 그 정도 가격을 받아도 될 정도의 퀄리티를 갖춘 숙소. 

 "냄새가 어때요?" 내 친구 파비앙이 웃는 얼굴로 묻는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무엇이든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그는 웃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내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세련된 옆모습과 주름진 눈가의 움직임, 자연스런 굴곡이 지는 얼굴에서 프랑스인의 고요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은 이제 막 변태를 시작한 애벌레 같았다. 잠깐의 침묵 후 파비앙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 당신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지요. 우리가 이렇게 우연히 만나 몇 주간 함께 붙어 다녔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당신은 지금 가슴이 부풀어 있겠지만 사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요. 하고 싶은 얘기들도 있고요……. 하지만 얘기하기가 꺼려졌고, 우리가 함께 다니던 시간 동안은 그런 얘기가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졌지요. 이제야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얘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면서 그는 말을 아꼈다. 그는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여행기 [기획 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