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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r 28. 2019

사랑 여행기 [쿠알라룸푸르 편] 상

이런 것을 좋아하나요? 

 “하지만 내 몸에도 상처를 입었다가 아문 자리가 많아요.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이 필요한 법입니다.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조르바-


  기다란 도마뱀 같은 말레이 반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뒤로 태국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몸 전체를 상상할 수 있다. 히말라야 산맥의 지맥이 반도의 골격을 이루며 양옆으로 통통히 살이 붙은 몸뚱이. 활엽수가 우거진 적도의 땅엔 그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세계 최고(古)의 열대 우림 타만 네가라가 있다. 공룡들이 걸어 다녔던 숲. 전설 속 포유류들이 진화를 시작한 숲.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꽃이 피어났을 숲. 빙하기에도 절대 얼지 않았던 상록수림, 타만 네가라.  

 타만 네가라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나아가면, 동남아 대륙을 찾아온 모든 이들이 찾아 헤매는 에메랄드 빛 바닷가들이 나온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국경에 면한 도시 조호바루를 지나, 미래에 존재하는 도시 싱가포르에 이른다. 

 2000만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검은 젖이 흐르는 축복받은 땅. 석유는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축에 속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말라카 왕국의 활달한 기상을 이어받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녀는 여행을 떠나 온 여자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짐을 들고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호주에서 보낸 세 개의 계절 동안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봄을 보내고 나서 느닷없이 호주로 떠나 생활을 시작했고, 나는 같은 기간 동안 한국에 남아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인생의 시간을 때웠다. 지루한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었다.

 나는 중화동 집 근처 카페에서 수 시간 동안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메신저를 통해 어딘가에서 찾은 멋진 시들을 타이핑해 보내주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좋아하였는지 내가 조금이라도 뜸하면 또 다른 시를 요구하곤 했다. 그땐 이미 세월이 변해서 국제 전화비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도 공짜로 통화를 나눌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도 그런 유별난 짓을 했다. 

 십여 년 전 내가 호주에서 생활할 적에는 국제전화 카드에 남은 통화 가능 시간을 계산하며 전화를 걸어야만 했었다. 좋아하는 여자와 1분 더 통화하기 위해 엄마와의 통화를 1분 먼저 끊어야만 하는 기분을 아는지? 호주 구석구석 공중전화 부스엔 내 아쉬움의 눈물이 말라 붙어 있다.


 하지만 가장 유별났던 건 그녀가 고른 생일 선물이었을 테다.

 눈이 펑펑 내리던 그해 12월에 나는 작은 택배 박스에 든 선물을 배달받았고 벅찬 가슴으로 박스를 열었다. 그녀가 보낸 선물은 스킨과 로션의 역할을 겸하는 화장품 한 통과 아르투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시집이었다.

 남자 친구에게 첫 생일 선물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보내주다니, 그녀는 단단히 미쳤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선물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였는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물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려 깊은 질문이다. 

 "이런 것을 좋아하나요? 나는 당신이 이런 것을 좋아할 것 같아요."

 걱정스런 그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한다. 

 "그럼, 좋아하고 말고."


쿠알라룸푸르의 확실한 랜드 마크

 우리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숙소로 향한다. 거리에는 다채로운 색상의 등에 불이 밝혀져 있다.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만월이 솟아 있다. 탁한 냇물이 흐르는 내천을 지나니 도시의 황량한 단면이 나온다. 버려진 개들이 장악한 도시의 뒷마당. 그곳에 우리가 묵은 숙소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한 가지 참으로 멋진 점은 숙소로 향하는 길에서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이 아주 잘 보인다는 점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길에 서면, 1점 투시도의 꼭짓점 부분에 쌍둥이 빌딩이 서 있다. 

 만월의 노란빛 아래서 하얗게 발광하는 페트로나스 빌딩.



 도시의 랜드마크는 정말 중요하다. 당신이 파리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아무 특별한 감각도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만일 저 멀리 에펠탑이 시야에 들어온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가슴이 뛸 것이다. '앗, 내가 지금 파리에 있구나! 영화 속의, 바로 그 파리!' 

 이륙을 준비하는 두 대의 로케트처럼 생긴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의 하얀빛을 바라볼 수 있는 길 위에 있으면 역시 가슴이 뛴다. '아, 내가 이 사랑스런 여자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의 밤 속에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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