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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24. 2019

사랑 여행기 [쾰른 편]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슬픔

마르셀네 집 쪽으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슬픔. 슬픔은 기쁨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차 안에서 마르셀은 나의 여자 친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자 친구는 수줍기도 하고 영어를 말하는 데에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우물쭈물거렸다. 그녀의 광대가 슬며시 붉어졌다.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공부를 하나요?" 마르셀이 물었다.     

 "영화를 공부하고 있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학교에 다니고 있지. 그녀는 매우 똑똑해. 현명하고."     

 "아, 영화감독이 되려는 건가요?"     

 "아니야. 그녀는 영화 제작 공부를 하고 있지만 감독이 되려는 건 아니야. 영화사는 다양한 업무를 하지. 제작, 배급, 홍보 등등 나도 자세힌 모르지만, 그녀는 영화사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해."      

 "아, 정말 멋진데요! 어쨌거나 영화인이군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영화를 만든다는 건 대단한 일이니까. 삶을 살만하게 만들어 주는 몇 안 되는 발명품 중 하나를 만드는 거지."     

 우리는 마을에서 유명하다는 피자집에 들러 씨푸드 피자와 살라미와 버섯을 함께 토핑 한 피자를 샀다.  

"진정한 독일식 피자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가게 주인한테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것을 잊지 마. 그 말을 들으면 기뻐서 두 판을 줄지도 몰라."


 피자 박스를 들고 차에서 내리니 집주인처럼 단정한 느낌을 주는 집 한 채가 서 있다. 수십 가구 정도가 가로수에 둘러싸여 조용히 몰래 살고 있는 마을.

 "다 왔습니다."마르셀이 특유의 사람 좋은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발걸음을 한 번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완전한 곳이다. 그곳은 그녀가 언제나 열병처럼 꿈꾸던 유럽의 가정집, 아멜리에가 니노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머리를 쓸어내리곤 하던 그런 집이었다.  


 어떤 사람이든 손님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한다. 알래스카 원주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르셀 또한 우리가 기쁘기를 원했다. 그는 혼자 사는 집에 우리를 이박 삼 일간 초대했고 초대한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 집은 우리의 마음에 쏙 들어서 마르셀을 몰아내고 둘이 그곳을 차지할 마음이나 먹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2층짜리 주택에서 2층 전체가 마르셀의 집이다. 층계를 올라가면 목문이 하나 나오고 그것을 열면 파스텔톤의 집 내부가 기다린다. 작고 오래된 주방이 있고, 마르셀이 자는 킹사이즈 침대가 놓인 방이 있다. 그리고 책장과 창문으로 둘러싸인 거실, 정원에서 꽃 냄새가 올라오는 최고의 베란다가 있다.

 사람은 머리가 크면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고, 공간을 갖는다면 이런 공간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나만의 냄새가 스며든 푹신한 공간. 침실로 들어가면 무거운 리넨 이불이 기다리고, 주방으로 가면 토스트와 커피의 냄새가 나는 곳. 베란다에 테이블과 의자가 두 개 놓여있고, 거기서 햇볕을 맞으며 간단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곳.

  

그릭 샐러드를 버무리던 아늑한 마르셀의 주방.

 마르셀과 나는 주방에 함께 들어가 그릭 샐러드를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만든 리코타 치즈라며 환하게 웃던 마르셀의 잇몸이 생각난다. 치즈 같은 인간, 마르셀. 나는 그가 속이 깊은 나무 볼에 각종 채소와 치즈를 넣고 버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르셀은 일본에서 사 온 것이라며, 마치 우리가 보면 안도라도 할 것처럼 나무젓가락 세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는 식사 자리에서 젓가락으로 병아리콩 같은 콩만 한 것들을 능숙하게 집어주었다. 사 온 피자와 그릭 샐러드를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마르셀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의 반응을 살폈다. 여자 친구가 맛있다고 칭찬하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우린 금방 서늘해지는 독일의 밤공기를 맞으며 와인을 마셨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지요?" 마르셀이 물었다.

 "꽤 복잡한데. 우린 영화관에서 함께 일을 했어. 여자 친구는 나보다 수개월 먼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지. 그때는 각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어. 말도 못 할 많은 일들이 있었지. 우린 거기서 함께 일 년간 함께 일했어. 그리고 난 외국으로 떠났고 그녀도 다른 곳에서 자신만의 생활을 했지. 그렇게 다시 일 년이 훌쩍 지났고 정말 우연히 다시 연락이 닿아 어쩌다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된 거야. 그 짧은 저녁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셈이나 다름없지. 누구도 이 모든 걸 기대하진 않았어. 단지 서로가 가진 특별함을 다시 보았고, 그걸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그녀와 마르셀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속눈썹이 떨렸다. 그녀는 속눈썹이 정말 길어서, 그녀가 다른 여자들처럼 인조 속눈썹을 붙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 정말로." 마르셀이 감탄했다.

 "고마워. 듣기 좋은데." 내가 대답했다.

 "두 사람을 보니까 부러워. 나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마르셀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왔다. 그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의 예전 여자 친구의 증명사진이다.

 "예쁘지 않아?" 마르셀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예쁘다고 했고 사진을 여자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나의 여자 친구도 예쁘다고 말하며 측은한 눈빛으로 마르셀을 쳐다보았다. 정말 치즈 같은 인간, 마르셀.

 "우린 9개월 전에 헤어졌어.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인 것 같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몇 개월이 흘렀으니까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지금은 알 수 없어......"

 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친구가 강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새로운 술을 따야만 했다. 나는 주방으로 갔고 마르셀을 불러 찬장에 놓인 리큐어 병을 따자고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술병을 땄다. 나의 여자 친구는 조금 피곤하다고 했고 나와 마르셀은 그녀에게 거실을 넘겨주고 베란다로 나가 술을 마셨다. 달이 차오를 때까지 나는 마르셀의 비참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몇 년의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의 인생 청사진에서 깔끔하게 오려지고, 흐물거리는 종이 인형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 발로 일어서려고 낑낑대는 사람. 그녀와 마르셀은 그동안 중독자처럼 눈이 멀어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뭔가 기분이 이상해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니 '아차!'싶을 만큼 순식간에 현실을 깨달아버린 거다. 한번 깨달음이 오니 그다음엔 더 깊은 깨달음이 왔고 그녀는 거의 라마가 되었다. 그녀는 아편 같은 중독을 이기고 몇 년을 끼고 있던 콩깍지를 벗겨낸 사람이었다. 이런, 조금 더 조심해야만 했어, 마르셀.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슬픔.

 마르셀은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슬픔 속에서 오래도록 원망하고 자기 연민을 자기 비하로 승화시키며 머물고 싶어 한 것이다. 헤어 나온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한다는 말과 같고, 그걸 극복한다면 그 사람에게 마르셀이 그렇듯이, 마르셀에게도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얼 하든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일. 그 생각에 대한 슬픔은 점점 더 깊이 침잠한다. 그 감정은 서사적인 배신, 혁명적인 변화, 전방위적 압박을 동반하는 강력 하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마르셀이라는 작은 섬을 초토화시켰다. 남은 건 그저 발 딛고 서 있을 모래뿐. 작은 입자의 모래뿐.


 우리는 리큐어를 한 병 더 마셨던 것 같다. 밤이 까맣게 깊었다. 마음이 뜨끈해졌다. 여자 친구 없이 나 혼자만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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