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쯤? 아빠 친구분들이 많이도 놀러 오신 날이었다. 다같이 약주를 하셨던 것 같다.
얼큰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아빠 친구분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다.
"아들~ 인사해야지" 하는 아빠의 말.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었는데
'안녕히 가세요던가? 계세요였나? 뭐지?' 가세요와 계세요가 헷갈리는거다.
그래서 나는 인사를 못했다. 아니 안했다. 아니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인사를 못했고 엄마아빠는 내가 인사를 안한다고 생각했다.
평소 나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 아빠도 그날은 무척 화를 내셨다.
무안해진 친구분들은 괜찮아 괜찮아 하며 그냥 집으로 가셨던 것 같다.
그저 그날의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가세요 계세요 미스테리와,
더 선명하게 남은 아빠의 화,
그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억울함이 내 안에 남아있다.
#2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전학을 갔다. 그래서 함께 앉게 된 짝과 친해졌다. 고 생각했다.
내가 친구를 선택하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와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면 친구가 됐다.
늘 같이 점심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겠지. 그러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말과 표정은 어린 마음에 콕 박혀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 불쌍해 보여서 좀 놀아줬더니"
#3
중학교 2학년 2학기때는 반장이 되었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2학기'에 있다. 내향적인 내가 1학기에 반장이 되는 건 불가능이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어쩌다보니 1학기 반장과 친해졌고 그 무리 중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친구들은 1학기 반장의 주변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나를 반장으로 뽑았던 것 같다.
어찌됐든 나도 반장이라구~ 하는 으쓱함이 나를 지배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내가 반장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고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누가 여기 반장이야?"
아마 반장 중에 가장 존재감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였을거다.
#4
대학교 전공 수업시간이었다. 교수들은 정말 조별발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향인의 착각인가.
아무튼, 어쩌다가 내가 발표를 맡게 되었다. 발표 전부터 긴장이 되고 얼굴이 빨개졌다.
영화같은 반전 없이 내 목소리는 덜덜덜 떨렸다. 아마도 C를 맞았겠지. (기억 안남)
#5
회사 행사에서 진행을 맡게 되었다. 본부장이 나름대로 나에게 준 기회였는데, 그 자리엔 유튜브 중계를 한답시고 카메라가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됐다. 보기 좋게 진행을 망쳐버렸다.
내향적인 나를 증명하는 기억들이다. 몇 개 꺼내놓고 보니 진짜 문제 있는 남자 같지만 그래도 산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려고 한다. 글을 쓰다보면 누군가는 공감해주겠지. 최소한 내향적인 내 아내는 공감해주겠지. 설마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아도 쓰다보면 나중에 우리 딸이라도 읽어주겠지. 그렇게 쓰다보면 내가 가진 장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내향적인 우리 딸이 가진 장점을 더 많이 알아줄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라며... 또 하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