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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구함 Sep 07. 2023

아빠가 실패하는 뒷모습

둔촌 백일장 입상 실패 후기


회사 일에 치여 글을 잊고 사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프의 카톡.



백일장이고 뭐고 신청할 정신도 없이 회사 일을 쳐내느라 저 카톡을 잊고 말았다.


와이프는 글을 잊고 사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며칠 후에 다시 카톡을 보냈다.



대충 찾아보니 둔촌백일장은 산문과 운문 분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시는 써본 적이 없으니, 일단 산문으로 ㄱㄱ 


언론사 입사 지망생이었던 시절이 1년 남짓이었고, 나름대로 사람들과 작문 연습도 꽤 했었다. 

몇 번이나 필기시험을 봤던 경험도 있고 떨어지기도, 붙기도 했으나, 

어쨌거나 어떤 장소에 어떤 시간에 어떤 누군가들과 함께 모여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나에게 딱히 낯선 일은 아니었다. 


무려 10년이나 지난 일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자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자신감의 원천은 딱 두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나는 

회사 동기가 심각한 이별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연애편지를 대필해 줘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골인한 러브스토리였으며, 


또 하나는 

계약직으로 일하던 후배의 자소서와 면접 대본을 써줘서 정규직까지 합격한 성공스토리였다. 


그 두 번의 경험은 내 양 어깨의 한쪽 씩을 관우와 장비마냥 차지하고 있었다.

백일장 당일에 집을 나서며 딸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딸! 아빠가 글 써서 100만원 타올게!!"  


그렇게 처음 참가한 둔촌백일장은 생각보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일단 강동 지역의 백일장인줄만 알았는데 생각 외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저 멀리 창원에서, 제주에서. 

그리고 참가하는 모두는 진심이었다. 내 앞의 노신사분은 손수 제작하신 휴대용 책상까지 들고 오셨다. 그야말로 낭만을 아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파티 같았달까. 


제시된 글제는 총 5개였다. 

혼밥, 의자, 인공지능, 생명의 땅, 갈등 


서걱서걱 


저마다 글 쓰는 소리들로 강당이 꽉 찼다. 나도 참 오랜만에 재밌게 글을 써냈다. (왠지 의자는 인기가 없을 거 같아서 의자로 써서 냄) 



그리고 며칠이 지나 입상작 발표날이 되었다. 


결과는? 


떙! 


없었다. 

아 요즘 렌즈가 자꾸 뿌옇긴 하네 ㅎㅎㅎ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없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딸의 얼굴.. 나는 딸에게 아빠가 탈락한 사실을 감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와이프에게는 슬쩍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발표 났는데~ 떨어졌더라고 ㅎㅎㅎㅎ 덕분에 재밌었어~" 




그렇게 와이프도 나도 둔촌백일장을 잊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 저번에 글쓰기 대회 나간 거 언제 상 타와??"


아빠가 상을 타오는 건 일단 기정사실로 정해둔 채 언제 가져오는지를 묻는 우리 딸. 

당황한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 그거 아직 발표가 안 났네. 좀 기다려 보자~" 


고민했다. 

아빠가 타오는 상이 무슨 모양일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딸에게는 항상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고 성공보다 노력을 칭찬했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이 못하는 건 금방 흥미를 잃고, 이기지 못하면 다른 게임을 하려고 하는 다람이에게는 

아빠가 실패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필요한 교육 아닐까 생각했다. 


실패, 그리고 더 큰 실패를 앞으로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될 딸이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했으면 좋겠다. 넘어졌을 때 실망하기보다 툭툭 털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다음날 나는 다람이에게 사실대로 말해줬다. 


"아빠 이번에는 상을 못 받았어. 근데 아빠는 도전한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었어. 내년에 아빠는 또 나가볼 거야. 그리고 상을 못 받아도 괜찮았어. 내후년에 다람이 초등학교 가면 아빠랑 같이 나가자!" 


실망한 듯 아닌 듯 금세 다른 얘기를 하는 다람이. 


실패를 마주한다면 꼭 옆에서 축하해 줘야지. 

도전했으면 됐어. 그게 너무 멋있었어. 

다음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축하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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