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치의
사람들은 자극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위험해 보이는 영상들을 스릴이라고 부르고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클릭을 유도하는 것을 후킹이라고 한다고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과잉 자극의 시대인 것 같다. 돌아다니지 못해서 더 그러는 것일 수 있겠다.
일상생활의 자극도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나는 숨이 좀 막힌다.
빽빽하게 가시 돋친 액체를 꿀꺽 삼킨 기분이다. 숨 쉴 때마다 찔린다. 집어삼킨 아메바 같은 액체가 가시가 빽빽한 성게로 변이 되면서 가슴팍에서 몸부림치는 그 느낌은 아프면서도 괴롭다.
아침에 잠깐 눈을 돌려 어떤 책 소개 멘트를 보았다. 너무 읽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그런데 또 나에게 너무 과할까 봐 참고 있다. 이렇게 사놓고 모셔두고 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 내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상태를 내가 기다린다.
모두들 일부러 결말을 숨겨둔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결말을 알아야 했다. 너무 과한 자극은 분명 몇 날이고 나에게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신중하다. 적당히 충격적이어야 내가 감당한다. 뉴스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본 책 소개 문구를 읽자마자 그냥 눈물이 났다. 타지에서 엄마를 잃고 엄마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 그냥 눈물이 나서 책을 볼 엄두가 안 난다. 나조차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나를 이해 함으로써 하나씩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고 적용하고 사색하고 종종 억울해한다.
텔레비전을 안 본 지 오래이지만 금쪽이는 유튜브로 찾아서 보는 편이다. 특히 숨죽여 우는 아이들을 볼 때 정말 가슴이 미어진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이해돼서 아프고 앞으로도 많이 힘들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안타깝다. 좋은 말을 해주고 싶지만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나조차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에 억눌려 다시 혼돈이 된다.
나조차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그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내내 고민하는 것 같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고 자신을 존중하며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잘 살아가 보자 조용히 텔레파시를 보낸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만으로 서로에게 기둥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