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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치의 장지혜 May 19. 2021

아침 기분

내향치의

눈이 떠졌다. 아침이다. 옆에 큰애는 아직 자고 있다. 코 고는 소리들이 들리는 늦은 아침이다.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타이탄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를 정리한다고 했다. 나는.

나는 먼저 안도한다. 

우울증 자가체크 항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은가요. 더 나쁜가요?' 

'당연히 나쁘지. 대부분의 아기들도 울면서 깨어나고 어른들도 눈을 찌푸리면서 일어나는데 좋을 리가 없지. ' 

이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는 아침에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다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느낌을 잊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안도한다. 그리고 살핀다. 나의 기분을, 그리고 생각한다. <타이탄의 도구들>에서의 명상과 비슷한 과정이려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안 좋은 느낌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무언가 기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물질이 머리에 가득 차 있어서 눈 사이 코를 지나 두개골 안쪽까지 주변 조직에 찐득하게 붙어서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이다. 당연히 사라져야만 하는 불쾌감을 가득 담고 있던 그 독약 같은 포이즌은 무방비 상태의 자고 있는 나를 점령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 사라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일어나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조금씩 사라져 간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줄 알았던 그 아침의 느낌의 존재와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약리학 시간 때였다. 어쩌면 흘러간다는 표현은 절절한 표현이었으리라. 그들의 나의 호르몬들이었다. 두 호르몬의 비율이 적절치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없다. 언제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얼음판을 걷고는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그 사실 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머리가 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가벼워지니 이제는 몸이 가벼워질 차례이다.

질문지의 '기분'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보면 틀린 표현인 것 같은데 그걸 대체할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기분이란 주로 어떤 관계나 현상에 대한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인데 아침의 나는 잠깐 비워 둔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뿐이다. 보이지 않는 침입자에게 점령당했던 나는 그 모든 상황이 '기분'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의문을 품는다. 외부의 자극에 의한 나의 반응이 아닌 그저 수많은 외부 자극 중의 하나이면서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고 설명할 수 도 없는 일종의 자극의 단지 내 안에 경계를 짓고 있다 해서 기분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상황은 흡사 다른 나라의 언어와 같다. 어떤 단어의 생성에도 일반적인 공감이 필요할 진대 공감이 없는 현상을 설명하려니 힘에 부치긴 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에는 기분이 제일 근접하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렇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감기처럼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오게 되면 나는 너를 알고 있음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응 방식을 모르는 수동적인 나이니 아직은 관찰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다시 나를 찾아오려거든 부디 노크를 해주길 바래. 너를 알아보고 바라볼 수 있게. 이번에는 네 얼굴을 똑바로 한번 쳐다봐야겠어. 너도 얼굴이란 게 있겠지.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을께. 넌 나의 호르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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