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불꽃 하나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

by 더웨이

유럽의 회색 하늘

1997년 11월,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기업 건설회사 차장으로 일하던 나는 그때 휴가를 내고 혼자서 Eurport, 1997 (CEDA Dredging Days) 전시회와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World Dredging 잡지에서 발견한 그 이벤트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선택은 대담했다. 40대 가장에게 부담스러운 항공료와 숙박비였다. 내 의지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었고 영어 실력도 토익 600대로 부족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직장 생활이 답답했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더 넓은 세상을 가보자. 현재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보자.' 그런 마음이 간절했다.


낯선 곳에서 마주친 현실

좁은 호텔 방 창가에서 바라본 도시는 낯설었다. 콘퍼런스와 전시회 등록도 쉽지 않았다. 영어는 알아듣기 어려웠고, 전시회 큰 규모에 압도되었으며 모든 것이 생소했다. 콘퍼런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발표자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중요한 단어들을 놓쳐서 제대로 메모하기가 힘들었다.


언어의 벽이 높았으며 만찬장에서 대화는 어색했다. 외국 엔지니어들과 대화 속에 끼어들지 못한 채,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그들의 웃음소리에 같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찬이 끝날 무렵, 용기를 내어 여러 참석자들에게 다가갔다.


서툴지만 천천히 명함을 건네며 내 소개를 했다. 상대방과 대화하며 표정을 읽고 세계 준설 시장 동향을 파악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전 세계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모두 진지하게 정보를 교환했다. 내 영어 실력 때문에 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명함 한 장 한 장이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소중한 네트워킹이라 생각했다.


운명을 바꾼 순간

내 인생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은 전시장 한복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기술 홉퍼 준설선 (Trailer Suction Hoppe Dredger) '제라두스 메르카토르 (Gerardus Mercator: 지도 제작자 이름을 선박명으로 사용)였다. 그 선박의 정교한 모형 앞에서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당시 국내 펌프식 기술로는 바닷속 수심 30미터 깊이까지 준설이 가능했다. 그러나 메르카토르는 무려 수심 103미터까지 준설할 수 있는 최첨단 기계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었다. 해저 토목 준설 공사 기술의 놀라운 발전이었고, 이 콘퍼런스에서 최신 기술로 소개되고 있었다.


바다 준설이란 얕은 바닷속 흙을 깊이 파서 깊게 항로를 만들고, 대형 무역선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바닷속 길을 내는 토목 공사다. 이를 위해서는 특수한 준설선이 필요하고, 선박의 형태와 용도에 따라 네 가지 공법으로 나뉜다. 1997년 당시 우리나라 건설업체는 홉퍼식 준설선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 특수선박의 기술과 능력이 정말 신비로워 보였다.


작은 모형 주위를 몇 번이고 돌면서 관계자에게 작동 방법 및 능력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 신형 준설선이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국 항만건설 시장에도 필요한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박의 선주 벨기에 'JDN'이라는 이름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의 구름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참가자들에게 받은 명함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떻게 연락할지 고민했다. 개인 시간과 돈을 들여 참석했던 전시회였다. 차츰 외국인들과 네트워킹하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김우중 회장은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 은 많다”가 베스트 셀러였다.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얼굴들을 다시 보며 넓은 세상에 진출하자고 생각했다. 글로벌 마켓은 철저한 준비 없이 경쟁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고, 한국에 돌아온 후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매일 새벽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 수업에 참석하여 젊은 학생들과 함께 영어 새롭게 배웠다. 영어 실력 향상이 무엇보다 급했으며 일상의 루틴도 영어를 우선적으로 했다. 그때 회사에서는 해외 진출을 위해 싱가포르 준설 매립 시장을 검토했지만, 최종 단계에서 포기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벨기에 그 회사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매니저로부터 한국 시장 조사를 위한 방문 계획이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후 미팅을 통하여 그 회사의 한국 진출 계획이 매우 적극적임을 알았다. 우리는 한국의 항만 준설 매립 프로젝트에 대하여 공사규모, 공사시기등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이란 참 신기하다. 2년 전 콘퍼런스에서 만났던 그 회사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그와의 만남이 내 인생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결국 1999년 4월, 나는 회사 창업과 동시에 글로벌 외국사의 한국 에이전트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적 같은 첫 성과

건설 공사는 입찰하고 낙찰되어야만 목표 달성이며 실적이다. 2002년,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 부산 신항만 항로 개발 프로젝트에 낙찰되어 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5개의 글로벌 회사가 치열하게 경쟁했고, 경쟁사 한국 대표들은 모두 5~10년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었다. 그때 경쟁사 대표 한 분이 내게 말했다. "박 대표는 정말 하늘이 도와주는 것 같다. 우리는 몇 번을 입찰해도 안 되는데 말야."


그 이후에도 부산 신항만 건설의 후속 프로젝트 3개를 계약할 수 있었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따로 있었다. 1997년 암스테르담 전시장에서 내가 숨을 죽이며 바라보던 바로 그 준설선 ' 제라두스 메르카토르'가 2003년 한국 부산 신항만 건설 매립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 대한 해협 바닷속 수심 -100m에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다. 부산 신항만 지역 부지는 이 모래를 준설하여 적재 후 90km 항해하여, 해안을 매립한 것이다. 여기가 지금 부산 신항만 컨테이너이너 부두다.


암스테르담에서 품었던 내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997년 IMF로 온 나라가 힘들어하던 그때, 그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내 작은 도전이 운명의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늦게 시작한 새로운 인생

부산 신항만 프로젝트를 계기로 나는 글로벌 해양 건설 회사와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걷게 되었다. 국내 프로젝트는 물론 해외 프로젝트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홉퍼 준설 공사를 시작으로 글로벌 해양 토목의 신기술을 배우며 능력을 향상했다.


그 후 해상 풍력 프로젝트, 해저 케이블 프로젝트, 해저 배관 프로젝트, 해양 에너지 등... 25년간 글로벌 해양 프로젝트와 국내시장에서 나름대로 포지셔닝을 할 수 있었다. 개인 휴가를 내고 참석했던 그 전시회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비 내리던 암스테르담 시간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마흔다섯에 시작한 글로벌 기업과 시작은 그렇게 작은 꿈에서 피어났고 결국 내 인생 전체를 이끌었다. 인생은 때로 답답할 때가 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때가 있으며 폭풍우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과 역경도 인생 여정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날의 감동

지금도 나는 때때로 그날의 암스테르담을 떠올린다. 회색 빛 하늘 아래 낯설었던 도시, 좁은 운하와 작은 배들, 콘퍼런스와 전시회, 신기한 해양 기계장치들, 경이롭던 “메르카토르” 그리고 긴장과 설렘 속에서 추구했던 꿈을 기억한다.


나이는 장애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첫걸음을 내딛는 용기다.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낯선 세계로 향하는 그 한 걸음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인생의 지평이 넓어졌다. 암스테르담의 그 비는 내 인생에 내린 축복의 비였다. 막연했던 일이 부딪혀 보니 새로운 운명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래된 약속